그당시 「인트라무로스」는 돌로 높이 쌓여진 성이었는데 그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셋이 있었다고 한다. 그 하나는 스페인 군인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던 북쪽에 있는 「이사벨」 성문이었으며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있었던 동쪽에 있는 「파리안」 성문이 있었고 남쪽에는 중앙 대성문 「루나」 성문이 있었는데 이 성문은 정부의 고관 귀족 또는 외국의 귀빈들만이 정식으로 출입하던 문이었다. 아직도 「이사벨」성문과 「파리안」 성문은 남아있고 「루나」대성문은 파괴되고 없다. 그렇다면 김대건은 동쪽에 있는 「파리안」 성문으로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그 성문에 들어서면 1621년에 세워진 목조건물인 「레뜨란」대학이 있었다. (이 대학은 1940년에 다시 「콩크리트」 건물로 신축했으나 1941년 일본군인에 의하여 일부가 파괴되었고 1945년에는 드디어 미군의 폭격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으며 1947년에 현대식 5층 건물로 신축되었다) 그리고 이 대학 뒤에는 도미니꼬회 본부와 기숙사가 있었는데 바로 스페인 군인들의 요새지인 「이사벨」 성문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도미니꼬회 기숙사 역시 제2차대전 당시(1941년) 완전히 파괴되었으며(도미니꼬회는 이미 1587년에 「마닐라」에 들어왔다) 지금은 그 자리에 「레뜨란」대학의 체육관이 세워졌다. 이곳에 김대건 신부가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성도미니꼬성당도 역시 1941년에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지금 그 대지는 개인에게 매매되었고 그자리에는 은행, 무역회사 등 세개의 현대식 고층건물이 들어섰다. 그곳에서 또 북쪽에 있는 도로 바로 건너편에는 「성토마스」대학교와 부속신학교가 있었는데 옛날의 국회의사당과 맞붙어 있었다. 옛날의 「성토마스」대학도 역시 1945년에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다만 현관으로 보이는 중앙문의 부분만 지금도 옛모습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성토마스」대학교의 「아취」형 교문은 현재의 성 「토마스」대학교의 정문으로 운반되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좌우간 이 도미니꼬회 본부 기숙사에서 우리 세 어린 한국신학생들이 기숙을 했을 것이고, 「성토마스」대학교 부속 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 하였을 것이다. 이 대학에서 북쪽으로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옛날의 국회의사당의 건물이 있었으며 그앞의 광장을 「마닐라」대광장(현재는 「맥킨리」대광장이라고 부른다)이 있고 그넓은 대광장 한가운데는 「명동」대성당의 네배가 더 큰 웅장한 「마닐라」의 대성전이 서있다. 이와같이 옛날에는 이 거리가 참으로 번화한 거리였으리라. 지금 현재 「인트라무로스」 성터가 남아있으나 몇군데는 파괴된채 남아있다.
이 성안에는 현재 「마닐라」 대성전, 「성아우구스띠노」성당, 「라떼란」 대학, 무염동정녀학교, 「성로사」대학교, 「산디아고」 박물관 등이 있다. 좌우간 이 「인트라무로스」 성 안에서 김대건 신부가 같은해 겨울 「마까오」의 민란이 수습되어 「마까오」로 돌아갈 때까지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3·4개월 공부를 한 셈이다.
■ 제2차 마닐라 방문
1839년 4월 김대건 신부가 「마까오」에 돌아간지 1년3개월후 더 심한 민란이 일어나 또다시 「마닐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번이 두번째 「마닐라」 방문이었다. 갤러리 신부아 데플레스 신부는 다시 도미니꼬회를 방문하여 공부하기에 조용한 곳을 구하던차 한달만인 5월 7일 「롤롬보이」 마을 안에 도미니꼬회 별장을 빌려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롤롬보이」라는 말은 대나무란 듯이며 그당시는 미개간지로 초목과 특히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서 그들의 말대로 「대나무골」(롤롬보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대나무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 「롤롬보이」를 중심으로 해서 북쪽으로는 「싼따 마리아」 강의 맑은 무이 흐르며 그 강물을 이용한 「귀곤」운하가 있다. (계속)
成應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