土着化(토착화) 摸索(모색)하는 修道會(수도회) ㊦ 맨발의 이티아비라 修士(수사)
아세아 凡(범) 베네딕도 수도원 長上會(장상회) 參加記(참가기)
食糧問題(식량문제) 해결에도 心血(심혈) 쏟고
복음, 强者(강자)가 弱者(약자)에게 전할 수 없어
세속에서 일하나 全生活(전생활) 기도의 연속
가난하나 思想(사상) 富裕(부유)한 印度(인도)
사두 이티아비라는 인도의 「케랄라」지방 태생이다. 그의 강연 내용과 그의 행동과 모습이 일치했기 때문에 청중들은 누구에게서보다도 사두 이티아비라에게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예수회에서 사제로 서품되기 8개월전인 1958년 「사두」가 되기 위해 허원을 풀고 나왔다. 인도에는 「사두」라는 제도가 있는데 그낱말을 직역하면 「형제」라는 뜻이 된다.
우리나라 말로 의역하면 「수사」라는 말이 된다. 사두 이티아비라는 이티아비라 수사라는 뜻이다. 사두들은 집이 없다.
이리저리 다니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날의 마지막 발이 닿는 그곳에서 잔다.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신도 신지 않는다. 옷도 인도의 촌부들이 입는 간단한 것인데 그나마도 갈아입을 것 외는 없다.
강론이 끝날때가 식사때이면 그곳에서 주는 것을 먹는다. 아무수도단체에도 가입하지 않고 세상사람들과 함께 산다. 이티아비라 수사님을 보자 마자 즉시 깐디의 생각이 났다. 「런던」에 공부하러 갔을때도 맨발에 인도 촌부의 옷을 입었고 5백년간 쟁취하지 못했던 인도의 독립을 아무 무력없이 성취시켰던 깐디가 그랬듯이 이티아비라 수사님도 맨발에 잔잔한 음성에 양순한 눈길에 초라한 옷차림이었지만 그 번득이는 슬기와 인류애와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강연이 끝나자 우뢰같은 박수가 보내졌다. 이티아비라 수사님이 처음 예수회를 떠날땐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 수도회 장상들과 동료들까지 반대의 의견을 말했지만 『사제직을 희생하고 세상에 직접 뛰어들어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에 관해서 말해주고 그들의 마음을 하느님이 다스리도록 하기위해서 사두가 되겠다.』라는 일념은 확고부동하였다.
천주께서 부르신 것이라면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사두식대로 길가나 학교나 역마당이나 할 것 없이 발길닿는 어디에서든지 또한 가톨릭신자이거나 힌두교인이나 프로테스탄트나 공산주의자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하느님의 복음을 이야기했다.
인도는 가난하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부유하다. 하느님에 관해서 이야기 하면 거의 모두가 귀를 기울이며 즐겨듣는다고 한다. 힌두교도들은 하느님을 믿는다. 그들은 가톨릭이 되지 않아도 크리스챤이 될 수 있다고 여기고 그 전에 『가톨릭 이외에는 구령의 길이 없다』고 했던 말에는 분개햇지만 그리스도만은 사랑한다고 한다. 근래에 와서는 초 · 중 · 고등학교 대학 국회 신학교 본당 수도회 등에서 수사님을 자주 초청하므로 청중을 찾아 걸어다닐 사이 없이 버스나 기차로 여행하며 바쁜 시간을 보낸다 한다. 그래서 이번 「방콕」 회의에도 초청되어 오신 것이었다. 그동안 이티아비라 수사님은 16권의 책을 저술했고 2천번 이상이나 가톨릭 잡지와 신문에 기사를 실었으며 수천 번의 강연을 했고 8종의 정기간행물에 정기적으로 기사를 내고 있다. 어떤 때는 하루에 5~8회 정도 강론을 한다고 하니 그 정력이 놀라왔다. 당년 46세이니 앞날이 촉망된다.
수사님은 쉬운 말을 사용하고 비유를 많이 들어 말하시는 것이 어딘지 예수님의 그것과도 같았다. 예를 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 심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물은 식물이 살기에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물을 줄 때 뻣뻣하게 서서 한꺼번에 쏟아 부으면 뿌리가 들어나면서 식물은 넘어지고 맙니다. 비록 물이 식물의 생명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 것이지만 물을 줄때의 태도에 따라 오히려 식물을 죽이는 수도 있읍니다. 식물을 살리려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 물을 조금씩 정성껏 주어야 땅 속을 곱게 스며듭니다. 이와같이 복음에는 영생이 있지마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는 가에 따라 좌우됩니다. 가수가 우리의 머리를 짓밟고 서서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누구나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강자가 약자에게 복음을 가르쳤읍니다. 인도에서의 복음전파는 식민지정책이나 정치적 세력과 결부되어 있었읍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읍니다.』
이티아비라 수사님은 이렇게 서구인들 앞에서 대담하게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서구인들이 더 그에게 찬사를 던졌다. 그는 기도저서 강연 등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뿐 아니라 인도가 큰 문제로 삼고 있는 「식량문제」에 대해서도 온 심혈을 기울이며 불타는 인류애와 민족애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저서 「식량문제의 해결」엔 식량 문제에 대한 구체적 방법들이 실려 있다고 한다. 수사님은 식량을 인공적으로 생산하려는 실험에 착수한지 1년이 된다고 하는데 그의 성공여부는 불문에 붙이고 그 적극성만 하더라도 놀라운 것이다.
수도자는 사람들의 영신사정뿐 아니라 육신의 사정에도 깊은 관심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아우구스띤회의 수도자였던 멘델 신부님이 수도원 정원 한구석 몇평 안되는 땅에 완두를 심어 실험한 것이 유전법칙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이르렀으니 실험 기구가 없다는 핑계는 하지 말자고 덧붙였다.
이티아비라 수사님은 정말 완전히 세상에 들어가서 일하지만 그의 전생활은 기도의 연속이다. 등불을 모말밑에 두지 않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촛대 위에 두었을뿐 관상생활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그의 생활이 증명했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 이후 수도자와 세상과의 관계가 밀접해졌는데 그 참뜻을 이티아비라 수사님을 통해서 좀더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이티아비라 수사님과 같은 생활양식을 그대로 모방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정신은 수도자들의 산 모범이 되리라 생각한다.
특히 그의 인간애와 청빈에 대한 정신이 그러하리라.
가끔 수도원을 보면 청빈을 부르짖으면서도 고층빌딩에서 거의 영업화 될 정도로 큰 사업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인적 청빈뿐 아니라 수도우너 전체의 청빈도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회의에서는 한 수도원에 너무 많은 수도자들을 수용하지 말고 인원이 많아지면 다른 수도원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강력했다. 그렇게 하면 수도원을 크게 짓지 않아도 되고 또 수도원 자체의 사업체를 크게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교회의 요청에 쉽게 응할 수 있으니 대단히 편리할 것이며 가족적인 분위기를 이루는 데도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때문이다.
이상으로써 사원의 나라 타일란드의 수도 「방콕」에서 열렸던 역사적인 모임에서 보고 들은 바를 간단히 적어 보았다.
김 베다(대구 성베네딕또수도회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