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1) 古宮(고궁)의 뜰에서 ①
발행일1968-12-25 [제649호, 8면]
라디오에서는 림스키·콜자코프의 「세헤라자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F·M방송이었다. 고전음악 푸로 볼륨이 낮은 라디오의 소리는 고요한 방에 고요히 퍼지고 있었다.
그 곱고 낮은 소리를 들으면서 현주(賢珠)는 힐끔 책상에 놓여있는 좌종시계를 보았다.
열두시십분.
아직 시간까지는 한시간이십분이나 남아있으나 현주는 얼굴을 매만지고 싶어졌다.
조그만 경대에 마주앉아 우선 크림통을 집어 뚜껑을 열었다. 짙게 화장을 해본일이 아직까지는 없는 현주였다.
그러나 오늘은 좀 정성을 들여 얼굴을 매만져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더라도 지나치는 건, 도리어 웃읍지않을까? 처음만나는 사람에게 그동안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던 인상을 깨뜨리게 해서는 안될 거라고 또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현주는 크림을 오른손 식지 끝에 찍어 왼손 바닥에 대고 똥굴 똥굴하게 비벼됐다.
그리고 두 손바닥을 합해 천천히 비볐다.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현주는 두 손바닥으로 두볼을 감싸듯 했다. 그리고 세수하듯 얼굴을 문지르고 있는데
『혜경이 아니야. 왜 그렇게 꼼작 안했어?』
어머니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혜경이가?』
현주는 움찔해지면서도 반가운 심정으로 얼굴에서 손을 떼고 문께로 가서 열고 마루에 나섰다.
『있었구나. 잘됐어.』
혜경(惠卿)이는 새로 마춰입은 코트인 모양 새디자인의 몸에 맞는 옷이 마치 팻션모델이 서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느껴진 것은 머리도 금방 미장원에서 나온 것 같은데다가 원체 예쁘게 생긴 얼굴에 화장도 정성들여 한 탓이었다.
『어마 이 아가씨 무슨 모양 그렇게 냈지?』
『모양? 흐흐』
혜경이 장난스럽게 웃더니
『까닭이 있는 거야.』
둥그런 눈을 더 크게 뜨고 말했다.
『까닭이 있어?』
『물론…』
『듣자구나…하여튼 들어와요.』
『들어 갈거 없이 얼른 입고나와.』
『나와?』
『오늘 내 호위병 돼줘야 할일 생겼어.』
혜경이의 느물대는 말에 현주는
『뭐 호위병?』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혜경의 예쁜 얼굴을 보았다.
『호위병 싫음…고문이라고 해줄까?』
『고문…』
『그래 고문…자문위원이라고 해두 좋구…』
『고문, 자문위원? 통 모를 소리뿐 아니야. 들어와 천천히 들어보구…』
혜경이는 팔목시계를 보더니
『그럼 잠깐만…』
현주가 인도하는 대로 방안에 들어갔다.
『무슨 일이구?』
마주앉아 현주가 물었다.
『선을 보는 거야』
『선?』
현주는 웃고 말했다.
『어째 그런 것 같더라…그래 날더러 함께 가서 봐 달라는거 겠구나?』
『그러니까 자문위원이지 뭐야.』
『상대는 어떤 사람인데?』
『케·에스 마크인데다가, 결혼하군 곧 미국에 간대. 가서 여권 수속해 보내면 신부되는 사람은 그 뒤를 이어…』
혜경이 역시 느물대면서 말했다.
『거 아주 조건 만점이구나. 그런 조건이람 자문위원 무슨 필요가 있겠어? 전에 알던 사람이냐?』
『어디? 알았음 맞선이 무슨 필요 있겠어.』
『참 그렇구나…』
현주는 문뜩 오늘 자신이 만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서
『그러니까 다른 조건은 좋은데 인물이 어떻겠나 _젠 그__이란 말이지?』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이를테면… 그런거 아니냐?』
『그렇긴 하지마는…』
혜경이 명랑하고 외향적(外向的)인 성격인데 비해 현주는 무겁고 내향적인 면이 많은 여자였다. 서로 다른 성격이 도리어 재학 중에는 둘을 친하게 만들었고, 학교 문을 나선 뒤에도 둘은 다른 동문들보다 각별한 우정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조건이 좋으니까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게 아니냐?』
『어련하겠니? 그래서 나한데 튀어 온줄 알고 있어.』
『그렇담, 긴말할 것 없어, 두시야 얼른 옷 입어요.』
혜경이 일어나 현주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울 형제였다.
『두시?』
현주는 무겁게 앉은 대로 되물었다.
『아직 한시간 15분쯤 남았지만 점심 사줄께, 함께 먹구 거길가면 돼잖아… 배가 불러야 사물(事物)이 똑바로 보이는 거 아니겠어』
『그건 그렇지 모르나…』
말하면서도 현주는 속으로
(하필 두시 꼭 같은 시간일까?)
쓴 웃음이 웃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라니까』 혜경이의 독촉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현주는 정색을 하면서
『두시엔 안돼.』
잘라 말했다.
『왜?』
혜경이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