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救世史(구세사) 교실] ⑤ 元祖犯罪(원조범죄)의 敎訓(교훈)
聖經太古史(성경태고사)
神話的(신화적) 平易(평역)한 敍述(서술)속의 엄청난 人間惡(인간악)의 歷史(역사)
발행일1969-03-23 [제661호, 2면]
원조 범죄의 이야기에는 限定된 의미에서 신화적 手法이 엿보인다. 예컨대 하느님의 擬人的 창조행위, 不死不老의 상징인 생명나무, 시원한 바람이 불 때에 동산을 산보하시는 하느님 「바빌로니아」나 「아씨리아」의 까리부(머리는 사람, 다리는 황소, 날개는 독수리 몸은 사자) 및 번갯불 모양의 칼과 같은 역할을 하는(까리부와 번갯불칼은 신전이나 궁전이 정문 守護像으로 이용되었고 때로는 국경의 경계표석으로도 사용되었음) 케루빔과 불꽃칼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 「낙원」의 「이미지」는 신화적이다. 그러나 「범죄 이야기」 전체를 신화로 간주하면 지나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 양심의 자각, 첫 선택의 비극,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온 사실, 인간적 상황의 發端 등을 상기시키고 있는 말들은 신화적 상징이 아니라 인간의 實存體驗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神 앞에서의 인간의 조건, 神의 法과 죄의 의미, 인간의 자업자득, 죽음의 신비 등을 形象化하여 실제로 전인류를 表象하고 있다.
원조들이 지선악수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것은, 인간이 창조주를 무시하고 자기에게 편리하도록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는 흐린 「지혜」를 가지려는 행위요, 하느님과 「함께」 지내는 것으로는 만족치 못하고 자기의 분수와 한계를 넘어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오만한 행위이다.
이 범죄 이야기는 外敵으로 파악되고 현실적으로 묘사된 史實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참가하고 있는 심리학적 · 형이상학적 · 종교적 「드라마」이다. 우리는 아담과 에와의 죄를 통해 인간의 죄의 본질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범죄 이야기의 또하나의 중요한 側面은 그 社會的次元이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書」 5장 12절에서 인류역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구속활동을 부각시키기 위해 아담의 죄에 언급하고 있지만 에와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범죄이야기에서 아담과 에와의 부부 상호관계는 중요한 본질적 요소이다. 남자가 완전한 自意識을 가진 것은 그 자신이 『이야말로 내 뼈중의 뼈요, 내 살에서 빼내온 살이로다』라고 외친 여자 앞에서였다.
남녀가 함께 自意識에 눈뜨자 곧 창조주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禁斷의 나무도,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유혹하는 뱀도 그 自意識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최초의 마음가짐은 자기 혼자 남몰래 정할 것이 아니라 「자기와 대등한 돕는 이」로서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여자와의 紐帶 속에서 정해야 했다.
즉 自意識에 눈뜨고 「자유」가 부여됨으로써 시작된 「드라마」는 他者와의 관계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他者와의 관계는 인간 체험에 본질적으로 갖추어 지는 것이며, 夫婦는 그 기본적 표상이다.
요컨대 성경 저자는 「땅에 자라는 가시덤불이나 엉겅퀴」 같은 인생의 비참이 個人 및 社會人으로서의 인간 전체가 自意識에 눈뜨고 「자유」를 알게 되면서 「하느님에게 등을 돌린 사실」로부터 비롯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에게 응답을 하지 않으려는 것, 즉 「참된 사랑」을 거절하려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원죄이다. 그것은 전염되고 만연된다는 점에서 비단 부모뿐 아니라 모든 어른(成人)에게 책임이 있고, 드런 의미에서 나도 포함한 전체 「인류의 죄」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 그 부모는 기껏해야 아들이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딸이기를 바랄 정도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들이건 딸이건 자라서 「참된 자유」를 행사하여 당신에게 『네』라고 대답할 줄 아는 「나」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에게 『네』라고 대답하지 않는 「나」를 아담과 에와에게서 발견하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의 「자유」는 손상되어 있다. 그러나 「한늼을 찾는」 참된 자유도 일부 남아있다.
그것은 원조들이 낙원에서 추방될 때 받은 희망(원시복음)처럼 우리의 橋頭堡이다. 이 신앙의 교두보를 확장시켜 가는 것이 곧 크리스챤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