宣敎師(선교사)가「테로」당해
神父(신부) 1死亡(사망), 修女(수녀)도 重傷(중상)
最惡(최악)의 나라「라오스」
平均壽命(평균수명) 30세, 文盲(문맹) 80%
國民(국민) 8割(할) 文化惠擇(문화혜택) 못받고
越盟通路(월맹통로)되는 共産地域(공산지역)
끈덕진 迫害(박해), 熱病(열병)이겨낸 福音(복음)의 씨
各(각) 宣敎團(선교단)서 社會事業(사회사업), 經濟開發(경제개발)힘써
『7월 5일 공산 라오스의 「테로」 복병이 「메콩」 강언덕 「팩세인」 근처에서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를 죽였고 두 수녀에게 중상을 입혔다.
복병들이 보이셀 신부의 『지프」차에 중공제 「로켓트」탄을 발사했는데 그로부터 1시간 후 숯이된 보이셀 신부의 시체가 발견되고 신부와 같이갔던 중상입은 두 수녀(성명미상)는 병원으로 운반됐다』고 라오스정부 공보부가 보도했다. 보이셀 신부는 1960년 이래 라오스공산군에 의해 살해된 10번째의 가톨릭신부이다. 주로 월맹군에 포함돼있는 라오스공산군은 지난 6월말 라오스북부 중앙고지에서의 격전에서 군사요지인 「무웅수오이」를 탈취했다. 「무웅수오이」는 제7도로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산에 있으며 「자르」평원의 공산군 본부 서쪽에 위치한다.
지난 몇달동안 라오·월맹공산군은 이 기지를 맹렬히 폭격했다. 왜냐하면 이 전략적 요지 「무웅수오이」와 이곳서 남쪽 50「마일」에 있는 「삼통」은 라오스 정부의 가장 중요한 북부의 두 군사기지였기 때문이다. 특히 작년 여름 미군이 월맹 폭격을 중지한 이래 라오스 공산군은 라오스 전역에 걸쳐 공격을 증가했다. 현재 라오스의 3분의 2이상을 공산군이 점령 또는 지배하고 있으며 총인구 2백70만명중 반수 이상이 공산지역에 있다. 민간인들은 기회만 있으면 정부 점령지역으로 도망치려고하며 현재 30만명의 피난민이 전적으로 정부의 도움을 받고 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라오스는 동남아시아의 중심에 있는 전략적 위치상 오늘날 동남아 및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의 하나이다. 인접한 두 공산국가인 중공과 월맹은 북과 동으로 국경을 넘어 끊임없이 그들의 경비병을 보내고 있으며 현재 중공의 5천명의 토목기사 및 인부들이 중공의 「유난」 성(省)에서 라오스의 「펑 살리」성을 지나 「무웅사이」까지, 다음에는 월맹과도 통할 길을 닦고 있다. 이 길은 보통도로의 2배인 20「피트」넓이로 북부 라오스의 유일한 차도이다.
월맹도 또한 라오스 동부와 중앙지방에 많은 차도와 「정글」과 산악에는 도보길을 닦았다. 수년동안 이 도로들은 「베트민」과 「베트콩」군을 위한 주요 통로가 되어 월남군과의 전투에 이바지했다. 월맹은 또한 태국과의 통로로서 라오스를 이용하고 있으며, 작년에 공산당은 동북부 태국을 공격키 위해 「테로」대를 증강시켰다. 라오스에서 싸우고 있는 5만명의 월맹군은 라오스 공산군의 중추가 된다.
아시아의 왕국 라오스는 1940년 이래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
1945년 3월 일본군은 라오스를 점령했다가 그해 8월 미국과 일본의 정전조약으로 철거했으나 몇달후 라오스공산당(PATHET LAO)은 「게릴라」를 조직하여 라오스 전역의 마을과 도시를 공격 했다. 1954년 7월 「제네바」 정전협정은 전투를 끝이게 했으나 라오스는 두개로 쪼개졌다. 라오스정부와 프랑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제네바」협정은 「평·살리」와 「삼 누아」 두 지방을 1955년 선거로써 재통합할 때까지 공산 라오스에게 주었다가 그후는 라오스 정부가 관리케 했다.
그러나 공산 라오스는 정부의 이 지방 관리를 군대의 힘으로 반항할뿐 아니라 경계선의 정부군 초소를 습격했다. 그들은 이와 같이 협정을 위반하면서 끊임없이 그들의 무력을 증가시키고 있다.
「제네바」협정에 의한 조정위원회(ICC)는 선거에 의해 수바나 푸마왕자가 연방정부 수상이 됐으나 이 선거는 공산당에 의해 「보이코트」되고(ICC는 1957년 11월 겨우 라오스를 통일시켰다. 그러나 불행이도 이 정부는 1960년 8월 9일 「꾸데따」로 붕괴되고 공산군과 반공산군은 다시 싸우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라오스는 전쟁으로 인한 미개발국으로서 아시아에서 으뜸간다. 국민의 年收入 67「달라」문자 해독자 12%, 평균 수명 30세로 모두 세계 최저기록이다. 80%의 인구가 도로와 통신 병원 학교가 없는 외따른 촌에서 살며 몇개의 도시이외에는 전기수도 전화가 없고 15세미만 아동 사망율이 80%로 세계 최고이다.
라오스의 가톨릭교회역사는 긴 폭풍의 역사이다.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250년의 끈덕진 박해를 겪었다.(국교는 불교) 첫 선교사는 1630년 수도 「비엔티안」에서 복음을 전한 예수회의 레리아 신부이다. 29년 후 「빠리」외방전교회가 교황 알렉산더 7세로부터 인도지나(지금의 월남·캄보디아·라오스)의 선교를 위임받고 들어왔다.
이로부터 「사이공」·「푸놈펜」·「방콕」에서 선교사들이 통나무·우차·말을 타고 또 위험한 「정글」산악지대를 걸어서왔으나 이들은 「마라리아」와 열대열병과 싸와야했고 치명자의 수는 늘어만 갔다.
산적에 의해 47명이 살해되고 15명이 「마라리아」로 죽어 한때 전멸상태였다. 그러나 살아남은 선교사와 속속 들어오는 용감한 젊은 선교사들은 끝내 라오스에 교회를 세웠다. 현재 여러 선교회의 95명 신부와 125명의 수녀가 선교와 각종 사회·사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비참한 빈곤과 극도의 후진성을 극복키위해 대규모의 사회경제 개발계획을 세우고 있다. 개발계획의 일부를 맡고 있는 미국가톨릭구제회(CRS)는 금년에 2백40만「파운드」의 식량과 25「톤」의 약품 의복 등을 보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