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는 「마리라오」 강이 흐르고 동쪽 중앙지대에는 넓은 미개간지가 있으며 풀과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 그저 버려져 있었고 서쪽에는 「마닐라」항으로 흘러내리는 「보까웨」강이 있다. 김대건 신부가 이 「보까웨」 강으로 배를 타고 「롤롬보이」에 왔던 것이다. 1640년 도미니꼬회에서는 동쪽에 내버려진 대나무골을 구입하였던 것이다. 이곳이 바로 「롤롬보이」인 것이다.
이 지역은 「마닐라」에서 바다로 75리(30㎞)이다. 도미니꼬회는 258년간 별장과 농장을 관리하다가 1898년 「롤롬보이」 주민에게 관리를 부탁하고 「마닐라」로 아주 떠나왔다. 그후 1907년에 이르러 「롤롬보이」의 농장과 휴양소(별장)을 포함한 모든 부동산을 미국정부에 매매하였고 이것이 다시 필립핀인에게 매매되어 지금은 완전히 개인의 소유로 넘어갔다.
■ 門만 남아있는 「롤롬보이」
작년 10월 19일(일요일) 날씨는 맑다. 필자는 이곳 「롤롬보이」를 김구정 저 「성웅 김대건전」 127페지 14행 『그곳 「마닐라」에서 30리 되는 「롤롬베이」 도민고 별장에서 수학』 이 문헌을 바탕으로 해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우선 나는 5천분의 1 「마닐라」 근방의 지도를 구하여 섬을 찾아보았다. 혹시나 「롤롬베이」라고 불리는 섬이 있는가 하고 - 아무리 샅샅이 찾아보아도 그 이름이 나오지 않아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마닐라」만(灣)하듯이 「마닐라」근처에 「롤롬」만이 있는가를 조사해보았으나 그것도 역시 허사였다.
섬도 「만」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될 수 있는 대로 30리 내외를 중심으로 찾다가 나중에는 50리 100리의 거리까지 찾아보아도 그 이름은 나오지 아니했다.
다음부터는 섬이나 만은 찾기를 포기하고 1830년경 도민고회에서 경영하던 별장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했다. 예수회 사학가 데 라 고스다 교수신부를 방문하였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마닐라」의 북쪽 「불라깐」주에 옛날이름으로 「롤롬보이」는 있는데 「롤롬베이」는 잘모르겠다고 하며 그 「롤롬보이」는 「보까웨」읍에 있는데 1830년경 그곳에 도민고회 별장이 있었느냐 하는 문제는 도민고회에 직접 가서 알아보라면서 성 「토마스」대학교 사학가 교수 파블로 페르난데스 신부에게 소개장을 써주었다. 그후 나는 페르난데스 교수신부를 방문하고 그분에게서 비로소 「롤롬보이」에 도민고회 별장(휴양소)이 있었다는 사실과 「인트라무로스」에 대한 것까지도 자세한 역사적 사실들을 알게되었다. 「롤롬보이」는 섬이 아니며 「보까웨」강 옆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동리다.
김대건 신부가 배를 타고 이곳에 왔기 때문에 어떤 섬으로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다시말하면 「롤롬베이」가 아니고 「롤롬보이」이며 이것은 섬이 아니며 「불라깐」주 해안에 속해있는 하나의 작은 마을이다.
필자는 「아테네오」대학교에서 「보니파시오」기념탑까지 버스를 타고 그곳에서 「보까웨」로 가는 합승을 갈아타니 약50분후에 「보까웨」읍에 도착했다. 요금은 30센트(한국돈으로 21원 해당)였다. 그 읍내를 서성거리면서 「롤롬보이」가 어디냐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으나 「따갈록」어를 사용하는 그는 나의 영러를 알아듣지 못하였다. 「마닐라」에서는 어디서나 영어로 통하였지만 지방으로 나가면 영어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왼쪽길 입구에 세워진 전선주를 보니 「롤롬보이」이라는 표시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다는 그 골목으로 접어들어 그 길을 따라갔다. 이곳에서는 삼륜차들이 손님들을 태우고 길을 누비고 있다. 소위 「마닐라」에서 말하는 택시에 해당하는 것이다. 성당이 보였다. 작은 마을에 비하여 너무나 크고 높은 성당이었다. 성당에만 찾아가면 「롤롬보이」 도민교회 별장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주임신부를 찾아갔다. 나는 방문목적을 말하였더니 친절하게 안내해 주며 『우리 「롤롬보이」본당에서 복자 안드레아 김 신부가 공부를 하셨건가요?』하면서 도리어 자기로서는 영광으로 여겼다.(사실 필립핀은 90% 이상이 천주교 신자이며 교회이 역사가 오래됐어도 수백년 이래 본방인 복자나 성인이 아직 한명도 없으니 말이다.) 이 「롤롬보이」본당은 3만명의 신자들을 사목하고 있으며 주임사제와 보좌신부 한분이다.
成應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