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뜨랑제 시절의 한여름] 여름휴가 위해 1년내 저축
여행비 없어 畵廊(화랑)·박물관 배회-빠리
수영캠핑장에 주민들 과일갖다줘-희랍
발행일1969-08-03 [제680호, 4면]
프랑스 「에껄깨르라빈」 디자인 학교가 있는 12구의 「츌레세잘」. 67년도 여름 처음으로 「빠리」에서 한국인 친구 한사람과 여름휴가를 보냈다. 예산관계로 여행을 떠나지 못한 우리들은 「빠리」 근교 「풀」장에서 숙박하며 지루한 2주일을 화랑이나 박물관 찾아다니 그림구경을 하며 소일했다.
궂은비 오는날 밤이면 향수에 젖은 내 마음은 고향생각에 궂은 비와 함께 울던 것이 여름 이맘때만 되면 기억이 새로워진다.
「빠리」에 여름이 오면 모든 사람들 마음은 「바땅스」기분으로 들뜬다. 유학온 학생은 물론 모든 가정에서까지의 여름휴가 여행준비는 장황하다. 국가공무원들에게도 유급 「바깡스」 기간이 한달 동안이나 주어지므로 7월 중순이 시작되면 8월 중순까지는 누구나 으례껏 여행을 떠나기 때문에 한 여름의 「빠리」는 이방인으로 득실거린다. 「빠리」를 떠나 여행을 즐기게 되는 이들의 가장 큰 이유는 「바깡스」 시기 동안 「빠리」의 물가는 봄 가을의 배로 상승하기 때문에 「빠리」에서 지내는 것과 외국여행을 하는 비용은 맞먹기 때문이다. 「빠리」의 상가는 피서오는 외국인을 위해 평소 가격의 배가되는 정가를 붙여놓고 기숙사비도 월60불을 백불 이상으로 올려 받는다. 이때문에 「빠리」 주민들이나 학생들은 휴가만 시작되면 그 즉시 「빠리」를 떠난다.
이들은 일년 생활계획에서 여름 「바깡스」를 가장 크게 잡고 일년전부터 준비한다. 주부들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시간제 노동을 하는가 하면 남편들은 매월 월급에서 예금을 시작한다. 일년동안 모은 그 돈은 그해 「바깡스」를 위해 몽땅 쓴다.
68년도 여름 3백불 정도의 돈이 마련됐길래 4명의 한국친구와 여행을 떠났다. 물론 간단한 취사도구와 텐트를 짊어지고 이태리를 거쳐 이스라엘과 희랍으로 갔다. 계절과 자연환경 사람들까지 한국과 비슷한데가 많았다. 서구의 여름은 계절의 뚜렷한 차이가 없어 슬며시 왔다가 슬며시 가기 때문에 한국처럼 무덥지 않는데 희랍의 여름은 무척 더웠다. 게다가 열풍까지 자주 불어서 한국보다 더 찌는 듯 했다. 서구여행에서와 같이 희랍에 들어서면서 안내서를 사 캠핑장을 찾아보았으나 캠핑장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저녁 9시경 하는 수 없이 「아테네」가까이 있는 어느 수영장에 들려 물어 보았다. 그 도시엔 「캠핑」시설이 되어있는 「캠프」장이 없다고 말하며 그곳 수영장에서 야영하라고 했다. 친절히 베푸는 선심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텐트를 치고 저녁을 지어먹고 있노라니 해수욕장 관리인이라는 사람이 커다란 비닐봉지에다 도마도를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주었다. 희랍말을 모르는 우리는 사라는 건 줄 알고 돈을 주었더니 그냥 먹으라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를 데리ㄱㅎ 도마도 밭으로 가더니 먹을 만큼 따가지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 호박같이 생긴 참외를 가지고 또 다른 이는 무화과를 가지고와서 먹어 보라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한 우리는 서로 쳐다보고 친절을 베푸는 그들의 심중을 의심까지 했다. 친절을 베푼 후에 외국인이라고 어떤 바가지라도 씌우지 않을까하고. 그러나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우리가 주는 돈을 받지 않았을 때 그 친절이 외국인에 대한 순수한 대접이었다는 걸 알고 고마운 생각에 머리가 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