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32) 돌아와서 ⑥
발행일1969-08-03 [제680호, 4면]
M대학에도 출강의 절차가 쉽게 매듭지어져 현주는 한주일에 두번씩, 부지런히 나가게 됐다. 처음서보는 교단이었으나 올라서니 걱정했던 것보다 재미있고 신명이 나기도 했다.
현주는 가지고 온 자료나, 외국에서의 강의 노트를 참고해 가면서 충실하고 새롭고 때로는 기발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비교적 성실한 태도로 이 여류 건축설계가의 강의를 듣고 노트하고 가끔 신랄하고 까다로운 질문도 해왔다. 즉석에서 해명해줄 수 있는 것이면 현주는 서슴치 않고 간명하게 설명했고 더 복잡한 것이면 충분한 자료와 더불어 다음시간에 상세하게 설명해주곤 했다.
학교에서의 현주의 인기가 학생들 사이에서 높아가고 있었다. 현주는 무슨 보람이나 느끼는 듯했다.
거기에 큰것은 아니나, 현주자신의 건축설계의 역량의 일단을 보일 수 있을 일도 맡게 됐다. M대학 동문회가 주동이 되어 기금을 조성해 착수하기로 되어 있는 민속박물관(民俗博物館)의 설계였다.
거리에서 만인의 눈에 뜨일 것은 아니나, 민속박물관이면 M대학의 캠퍼스 안에서 뜻있는 학도들에게 두고두고 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건물이다. 현주는 이일을 맡게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이렇듯, 강의 준비와 설계준비에 현주는 갖 귀국했을 무렵, T·V 등 매스·메디아에 불리워 다니느라고 바빠 돌아갔던 방이상으로 그러나 충실한 시간을 보내게 됐다.
그러나 현주는 내면으로는 쓸쓸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현주를 여성으로 상대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강의에서 인기를 얻게 되는 것는 그리고 많은 설계가중에서 뽑혀 민속박물관의 설계를 맡게 된 것도 까놓고 보면 현주가 여성이기 때문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여성은 전공방면, 학적인 방면에서의 여성이다.
현주는 그런 것을 떠난, 알맹이 인간으로서의 여성대점이 아쉽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 하나 현주를 결혼상대로 「프로포즈」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박훈씨의 초대를 받은 뒤에 더욱 그런 적막감이 느껴졌다.
어느 토요일 저녁이었다.
현주는 Y 교수와 함께 박훈씨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함께 택시를 타고 가면서 현주는 박훈씨의 생활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포공항에 내려 서울로 들어올 때부터 Y 교수에게 묻고 싶었던 박훈씨의 그후의 일, 즉 결혼 여부에 대해서 지금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당장 그의 집으로 초대를 받아가는 마당에서는 알고 가지 않아서는 오히려 실례를 저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얘기가 몇입니까?』
이렇게 말했다.
『박군 말이오?』
『예』
『그게 그런데 없단말이오』
『옛?』
현주 「없단 말이오』를 결혼안했다는 말로 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Y 교수는
『아주약해요. 늘 구들장 신세만 지고 있거든요. 박군 공연히 결혼했다고 후회하지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결혼했군요』
현주는 저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나갔다.
Y 교수는 힐끔 현주를 보았다. 아무말도 아니했으나 현주는 「앗차」실언이었다고 뉘우쳤다. 실언이라기보다 마음속의 비밀을 무의식중에 털어놓은 푼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Y 교수는 당장 말은 없었으나 얼마지난 뒤 입을 열었다. 현주의 심중을 충분히 짐작한 모양이었다.
『현주군이 떠난 후 일년쯤 지나서일까…? 이런 말은 하지 말려고 했었는데 그래서 현주군을 처음 김포에서 영접한 이래 지금까지 입술에 올리지 않았었는데 기왕 말이난 김이니 말이지마는 자네 때문에 상당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모양이었어. 그러다가 지금 부인과 결혼했지. 그랬는데 그 부인이 약골이라…』
『그랬었군요.』
현주는 Y 교수의 말을 그 이상 듣는 것이 괴로웠다. 그래서 그 말을 제지한 셈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8년 동안에 결혼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내가 어리석은 여자다. 더구나 떠나기 전에 마치 사무적인 서류에 부결(否決)의 싸인을 하듯이 거절해버린 내가 아닌가?
가슴이 짜릿, 아픈것 같았다. 부끄럽기도 했다.
(모두 저의 잘못이었어요.)
그러나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이런 착잡한 현주의 심중을 헤아리는 듯이 Y 교수는 담배를 붙여 빨면서 쿳션에 기대앉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줄 알았더면 초대에 응치말걸…)
현주는 생각했으나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체하고 손님노릇을 해야 되는 거야…』
마음을 가누어 잡았다.
어느듯 차는 박훈씨집 골목으로 들어서 그 집앞에 머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