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救世史(구세사) 교실] ⑥ 카인과 아벨
聖經太古史(성경태고사)
現代不安(현대불안)의 原因(원인)
神(신)으로부터의 疎遠(소원)
발행일1969-03-30 [제662호, 2면]
아놀드 토인비가 「유치한 두 문명의 擬人化」라고 말한 바와 같이,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는 이미 상당히 발달된 문화, 종교예식, 카인을 첩러하려는 사람들의 존재, 카인을 보호하려는 부족의 존재 등이 전제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說話는 원조의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케니트」氏族(민수기 24·21 판관기 4·11 참조)의 創名始祖에 관한 이야기다.
「케니트」족은 이스라엘과 같이 야훼를 숭배하였으나 문명의 외곽지대에서 방랑생활을 하던 유목민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본시 유목민이었다)
사람들은 「케니트족의 방랑벽은 어디서 생겼을까」하고 自問하였다. 그리고는 이 수수께끼를 다음과 같이 풀었다. 『한곳에 오래 눌러있지 못하는 케니트 사람들의 방랑벽은, 죄를 저지르고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떠돌아다닌 그 조상에서부터 비롯하였다』고. 그 조상은 바로 카인이라고 했다.
성경저자(야휘스트)가 이같은 한 씨족의 始祖 이야기를 원조의 자식들의 說話로 각색함으로써, 이야기는 한 씨족의 범위를 넘어 인류의 비극을 부각시킨 보편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인류가 하느님에게 반역한 결과 인간끼리도 화목하게 살지 못하고 서로 싸우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미 앞에서(前回), 「원조 범죄 이야기」는 자기 존재와 운명의 절대적 지배자가 되려는 욕망과 실제로는 그렇게 될 수 없는 限界를 느끼는 인간실존의 갈등을 묘사한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에 대한 거역은 곧 인간의 자기 운명에 대한 반항이다. 성경저자는 하느님에 대한 疎遠이 필연적으로 自己疏外와 他人으로부터의 孤立이라는 破局을 초래한다는 것을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카인은 야훼께서 동생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시고(헤브레아 사람들은 어떤이의 일이 잘될때 그것은 하느님의 好意 때문이라고 생각했음) 자기의 제물은 반가와하시지 않는것이 몹시 언잖았다. 이를테면 『四寸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나아 속담대로, 카인은 동생의 일은 잘되고 자기의 일은 잘되지 않는데서 자기분열을 일으키고 좌절감을 느낀 것이다. 이러한 自己疏外는 다른이에 대한 시기, 혹평, 분노로 발전하기 마련이다.
『어째서 너는 골을내고 또 어째서 얼굴을 숙으리고 있느뇨. 네가 착하게 살면 얼굴을 들 것이 아니뇨. 만일 착하게 살지 아니하면 죄가 문간에 응크려서 너를 해치려 노려보고 있지 않겠느뇨』(창 4 · 7) 여기서 올바로 살지않는 자에게 善은 질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질책은 죄인에게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이 갈등에서 벗어나려는 죄인이 몸부림은 어느덧 다른이에 대한 증오와 박해로 표현화 한다. 그러면서 더욱 깊은 갈등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간다.
마침내 카인은 아벨을 죽였다. 동생의 행방을 묻는 하느님에게 카인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모르나이다. 내가 나의 아우를 지켜주는 자이오니까』 이것은 反社會的인 선언이요 他人으로부터의 격리요 공동생활에 대한 自家당착적인 拒否이다. 「카인의 살인」은 어늘날에도 우리의 주변에서 아니 「우리 안에서」 매일 되풀이 되고 있다. 우리는 마음 속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는가!
현대인의 極限的인 상황의식, 갈등, 불안, 좌절감, 소외감도 「근본적으로는」 神으로부터의 疎遠에 뿌리를 박고 있다. 현대인은 懷疑論을 통해 神을 떠나 自己에게 돌아왓으나 그만 「자신안에」 감금되고 말았다.
여기서 스스로 쫓는 사냥개인 동시에 또한 쫓기는 토끼가 되기도 하는 一人二役의 비극이 벌어진다. 현대인이 이 「자신 안의 감옥」에서 해방되려면 다시 神을 찾는수 밖에 없다. 그리고 神은 다른이들의 복수가 두려워 불안에 떨고 있던 카인에게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표」를 찍어주셨듯이(이것은 하나의 「장소」 즉 살인자들에 대한 무차별 복수를 막기위해 「요르단」강 건너편에 만든 治外法權的 「피신읍」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 신명기 4 · 41~참조), 현대인에게도 자기가 원하면 언제든지 「에고」(EGO)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탈출발법을 마련해 주시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二重 계명」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때 우리는 자신 아늬 감옥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은총으로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