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신자 2천명만 되어도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면서 사제관에서 의자생활을 하는 사제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마닐라」에서는 각 본당마다 신자수가 평균 4만 내지 5만명이며 신부 3명정도가 사목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제의 수가 부족한 것이다. 이곳 신부들은 사목활동에 바빠서 사냥이나 낚시나 바둑을 두면서 한가한 시간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바빠서 힘들어 죽겠다』는 사제는 보지 못했다. 한가한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성당건물이나 사제관을 지키는 것만이 사제의 과업은 아닐 것이다. 이 「롤롬보이」 도미니꼬회 별장 역시 제2차대전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불행히도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 별장을 둘러쌌던 높은 돌담은 아직도 옛날 그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높은 성문안으로 들어서면서 바로 여기가 김대건 신부가 어린 소년시절에 공부를 하던 곳이구나 생각하니 감개무량하여 눈시울을 적시었다. 기쁨과 회상에 잠겨 사방을 휘돌아다 보았다. 필자와 함께 동행했던 보혈회 조 마리아 그라씨아 수녀는 손수건을 꺼내어 연방 눈물만 닦고 있었다. 이곳을 찾느라고 참으로 어려면으로 분주했으며 또한 시간도 많이 소비했다. 바로 이곳이 우리가 찾던 「롤롬보이」라는 점과 우리 한국의 복자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 계셨다는 반가움과 감격에 눈물을 흘렸으리라.
마음을 가라앉히고 텅빈 넓은 옛터전을 두루살펴보았다.
그저 내버려둔 잡초밭이었다. 옛날 별장의 초석들이 이곳 저곳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다. 그많던 돌들은 동리사람들이 제각기 자기들의 집으로 운반하여 주춧돌로 사용하기도 하고 담을 쌓기도 하고 화단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 별장으로 들어가는 성문이 두개가 있는데 동쪽문과 서쪽문이 있다. 동쪽문은 현재 돌기둥 하나만 남아있으며 서쪽문은 옛날 그대로 보존되어 남아있다.
동쪽문은 「보까웨」읍으로 출입하던 문이었고 서쪽문은 「마닐라」에서 「보까웨」 강을 따라서 별장으로 출입하던 문이었다. 『복자 김대건 신부가 여기에서 공부하였구나…』 어린 그모습 그태도 그걸음걸이가 이곳 저곳에서 보이는듯 했다.
또한 김대건 신부가 이곳에서 바로 이 성당 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국에 계신 부모님의 정다운 편지(1839년 8월경에 받았음)를 받은 곳이다.
17세의 어린 김대건의 그 마음을 상상해 본다. 그 편지를 받고 얼마나 눈물겨웁고 반가와 했으랴!
편지를 쓴 날자는 1837년 늦은 가을인데 이 편지가 「롤롬보이」까지 2년이나 걸리는 동안 동지사의 손을 거쳐 하인으로 가장한 심부름군의 품속에서 북경성당으로 다시 「마까오」에서 바다를 건너 「마닐라」의 「인뜨라무로스」의 성도미니꼬회 본부로 왔다가 「롤롬보이」 별장으로 휴양차 떠나던 도미니꼬회 신부의 편에 김대건에게 전해진 것이다. 타향살이 4년만에 처음받은 고국 부모의 편지, 그 내용은 집안 안부와 나 신부 정 신부의 무사함과 그분들의 전교활동으로 이제 조국에 근 만명의 신자가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이 편지를 받고 김대건은 얼마나 기뻐했으랴! 다시금 새로운 각오와 중한 책임감을 느꼈으리라. 참으로 희망과 용기를 준 편지였다. 편지를 받고 기뻐하던 곳 「롤롬보이」 이곳이 김대건 신부가 11월경 「마까오」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근 반년이나 생활한 곳이다.
「보까웨」 뱃터 옆에 커다란 호수가 있어 신부들의 전용수영장이라 지금도 이 강을 『신부들의 수영장』이라고 부른다.
「마닐라」항에서 바닷바람이 「보까웨」강 골짜기를 따라 불어와, 「롤롬보이」는 언제나 시원하며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을 주로해 강에는 수십척 어선이 항상 고기잡이에 바쁘다. 옛날의 도미니꼬회 별장이 있던 이 성안에는 지금도 흘러간 옛날을 지켜보던 몇그루의 고목이 있어 동리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계속)
成應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