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救世史(구세사) 교실] ㉔ <모세시대> ③ 모세의 聖召(성소)
“내가「여기」있노라”
唯一神(유일신)의 永遠(영원)한 現存(현존)
발행일1969-08-17 [제681호, 2면]
시나이반도의 광야로 피신한 모세는 유목민 미디안족의 族長이며 제관인 예트로의 사위가 되어 장인의 양떼를 치면서 세월을 보낸다.(후대의 이스라엘 백성가운에 「하느님을 만나뵈려면 광야로 가야 한다」는 신념이 생긴 것도 모세의 이 광야생활에서 기원하였을 것이다. 예수시대의 유데아인들도 구원자는 모세처럼 광야에서 온다고 믿고 있었다.) 어느날 모세는 牧草地를 찾아 양떼를 몰고 호렙산(시나이산)쪽으로 갔다. (같은 산을 엘로히스트 史料는 호렙산이라 부르고 야휘스트 史料는 시나이산이라 부르고 있다) 산에서 모세는 「활활 불붙으면서도 타없어지지 않는 가시덤불」을 발견하였다. 신기하게 여겨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세야, 모세야… 나는 너의 조상의 천주이니, 곧 아브라함의 천주, 이사악의 천주, 야곱의 천주이로다. …나는 에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익히 보았고, 또 저들이 자기들을 강박하는 자들 때문에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노라. 참으로 나는 그들의 곤궁을 잘 알았노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에집트의 손에서 구해내 내어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게 하려 내려왔노라. …그런즉 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에집트에서 내보내기 위하여 이제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고자 하니 너는 가거라』(출애 3·1~10). 모세의 이 聖召는 모든 예언자 召命의 典型的인 형식을 보여준다. 즉 하느님은 먼저 「幻視」를 통해 당신의 慶威를 感得케 하시고 다음에 예언자의 전 생애를 변경·一新시키는 명령을 내리어 「派遣」하시는 것이다.
모세가 이 부르심을 받고도 「내가 무엇이 온데…」하고 주저한 것은 그것이 인간적 상식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권세를 알고 또 자기 힘의 한계도 잘아는 그로서는 현실주의적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내가 이스라엘의 후손들한테 이르러 저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천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고 말할 때, 저들이 나에게 그이의 이름이 무엇이뇨 하고 물으면 저들에게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오리까?』(출애 3·13)이 물음은 모세가 자기 동족의 신앙상태에 어느 정도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에집트 諸神의 수는 무려 2천을 넘었고 각각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호화찬란한 神전 안에 모셔지고 거의 에집트化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낮이 익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조상들의 하느님」이 오히려 낯선 未知의 神이 되어있었다. 모세가 이 조상들의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는 경우 그들은 필시 이 하느님의 이름을 물을 것이 틀림없다.(이 대목에는 비록 일시적으로 亡命은 하였으나 동족을 노예생활에서 구출하려는 모세의 민족지도자다운 內的 고민·주저·갈등이 劇的으로 形象化되어있다.)
『너는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내가 「여기」있노라>하는 이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고 말하라』(출애 3·14)
<내가 「여기」있노라>라는 말은 「야훼」란 헤브레아 말을 풀이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름에 관한 계시증언이 아니라 바로 하나의 기쁜 소식이다. 이 소식은 모세를 파견하신 하느님의 거처가 결코 어떤 거룩한 장소나 산이나 신전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친다. 하느님은 에집트의 잡신들처럼 한곳에 定住하여 계시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오직 「계시는 분」 즉 바로 지금여기 이스라엘의 역사와 더불어 계시는 분이시다. <내가 있노라>라는 말은 단지 하느님의 존재만 뜻하는 말도 아니고 또 「내가 없는 곳 없이 어디나 있다」는 하느님의 遍在만 뜻하는 말도 아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唯一神의 영원한 現存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있노라>의 뜻을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노라>로 알아들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 때마다 되풀이 하여 듣는 「도미누스·보비스꿈」=「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래에도 계실」 하느님의 현존에 관한 기쁜 소식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고 당신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언제나 가까이 계시는 분이다」(사도 17·27 참조)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자기들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을 때 당신은 「우리와 함께 여기 계신다.」
불타오르는 가시덤불에서 들려온 「하느님의 부르심」과 이에 대한 「모세의 응답」으로 하느님과 인류와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상 중대한 「싹」이 바로 이 시간에 잉태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