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年(년)의 발자취] 本堂(본당)·敎會機關(교회기관) 어제와 오늘 ⑦ 경기도 美山里本堂(미산리본당)
敎難(교난) 때 避身(피신)·定着(정착)한 聖地(성지)
네 福者(복자) 墓所(묘소), 巡禮客(순례객) 줄짓고
復古(부고) 위해 神父(신부) 모시기 所願(소원)
발행일1969-08-17 [제681호, 3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노곡리에서 동쪽으로 10여리 접어들어가노라면 차령산맥의 험준한 줄기가 하늘을 가린 채 양팔을 벌린 듯이 뻗어 계곡을 이루고 있고 맑은 냇물이 사철 마름없이 흘러 내린다.
이 개울 이름이 「미리내」. 미리내를 따라. 두마을 50호가 있으니 이 마을이 「미산리」(美山里)라는 곳이다. 이 마을의 역사는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이 후 겪어야했던 온갖 박해와·수난의 과정에서 신앙을 지키려는 선조들이 명예와 가산을 버린 채 관헌의 손이 미치지 않는 산골로 숨어들어 숯굽고 옹기구으며 정착하던 1820년대부터 이어져 지금은 한국 최초의 신부였던 복자 안드레아 신부의 묘자리와 함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선조들이 겪었던 고초를 후손들에게 상기시키는 가톨릭의 聖地로 해마다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따라서 이 마을 50호 중 38호가 적어도 3·4대 내려온 신자집안이고 비록 지금은 60여년전에 분가시킨 안성본당의 공소로 되었을 망정 일요일이면 일손을 멈추고 한마을 모두가 성당에 모여 회장을 중심으로 공소예절을 바치고 있다.
미산리에 본당이 설정되기는 1896년 대원군의 모진 박해가 끝난지 10여년 후이지만 아직도 지방에 남아있던 박해의 잔영(殘影) 때문에 활발한 전교활동을 하기 어려운 때였다.
이런 어려움 속에 첫발을 디딘분이 孟(佛人) 신부였다. 孟 신부는 현성당 근처에 조그만 초당을 짓고 상투튼 평복으로 인근 신자들을모아 미사를 지내며 미산리를 경기도 일대의 전교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2대 강마르꼬 신부는 지금의 성당도 마련하고 광주, 이천, 안성,용인 등지에 20여개의 공소를 두는 큰 본당으로 발전을 보아 춘추 판공때 공소순시에만도 3개월이 걸렸고 1920년대 신자수는 3천여명이나 되어 큰 축일 때가 되면 2·3일전부터 인근신자들이 모여들어 큰 잔치를 치루는 것 같았다 한다.
그런가하면 미산리본당은 이 일대의 교육중심지었다. 1898년에 세운 海星學院에서는 조선어, 한문, 습자, 산술을 가르쳐 군수를 비롯한 많은 지방인재를 배출했다.
이 학교는 4대 최베드로(문식) 신부대까지 계속되다가 6·25사변후 문을 닫았고 지금은 빈 교사만 창고로 쓰여지고 있다. 이처럼 초대교회부터 경기도 일대의 전교 중심지로 발전했던 미산리본당이었지만 지리적으로 워낙 교통이 불편한데다가 발전할 여지가 없어 안성이나 용인지방으로 전교 중심이 옮겨져 1963년 수원교구가 창설되면서 안성본당공소로 되었다.
그러나 이곳 신자들은 64년전에 중국(中國) 기술자에 의해 3년만에 준공한 70평의 석조성당과 사제관을 외로히 지키며 다시 신부 부임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성당에서 내(川)를 따라 5백m 올라가면 네 신부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고 이 무덤을 굽어보며 조그만 성당이 하나 서 있다.
여기가 복자 김대건 신부가 묻혔던 곳이다. 복자 김 신부님이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치명하자 이 마을의 젊은이 11명은 시체를 지키는 감시가 풀린 30일에 유해를 다시 파내 밤을 도와 2백여리나 떨어진 이곳 미산리에 안장했다.(그후 1925년 서울가톨릭대학으로 이장되어 지금은 무덤자리만 남아있다)
그 오른쪽에는 3대 조선교구장이었고 김 신부의 신품성사를 집전했던 페레올·고 주교가 자신의 소원대로 김 신부 옆에 누워 있다.
그 오른쪽이 4대 최베드로(문식) 신부 왼쪽 첫 무덤은 2대 강마르꼬 신부의 무덤이다. 강 신부는 1896년 6월 4일 약현성당에서 있은 한국최초의 신품성사를 통해 탄생된 세분신부중의 한분으로 그해 부임하여 1929년 선종할 때까지 미산리에서 평생을 보낸 분으로 성당을 짓고 해성학교를 창립하였으며 1928년에는 복자 김 신부의 무덤자리에 복자성당을 지어 聖地로 정리했다. 반면 지역개발에 힘을 기울여 40년전에 손수 키운 감나무묘목을 1인당 10주씩 나누어 주며 무조건 10배로 늘리라는 엄명에 정성을 다하다보니 지금은 1년에 세대당 34만원의 수입원이 되었다.
이제 미산리본당은 그 임무를 다하고 역사만을 간직한 채 성지의 보모(保母)로 순례자들 가슴속에 살아갈 것이다.
▲역대주임신부
1대 孟 신부(佛人)
2대 姜마르꼬 〃
3대 陸佳恩 〃
4대 최문식
5대 조인환
6대 신종호
7대 윤형중
8대 김덕명
9대 김철규
10대 김창문 (建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