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은 주께서 만드신 날이니 환호하고 기뻐할지어다』(부활주일 대경)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 다시 환희의 날을 맞아 여러분과 함께 충심으로 기뻐해 마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참된 믿음과 기쁨의 원천이 됨은 그의 강생과 수난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우리에게 대한 사랑이 죄악과 그 결과인 죽음마저 쳐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가 헛되지 않고 영원히 보람됨이 여기서 증거되었읍니다.
무고한 그리스도가 처형될 때에, 만사는 절망적이었읍니다. 그리스도 죽으심과 함께 참된 삶과 보람 또한 매장되었읍니다. 반석(盤石)으로 굳게 닫힌 무덤에서 빛과 생명이 소생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 못했읍니다. 「엠마우스」로 가던 예수의 두 제자들의 대화는 이것을 너무도 잘 실증하고 있읍니다. (루까 24·21) 사도 토마가 그러했고 모든 제자들이 그러했읍니다. 3일만에 부활하리란 말씀을 확신하기엔 너무도 절망적이었읍니다.
합리주의적인 인간의 지능으로 그리스도는 영원히 죽었고, 또한 그 죽음을 다스리시는 천주의 전능하심을 잊고 말았읍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사랑으로 다스리시고 사랑으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사랑으로 죽음을 이기신, 바로 사랑 그 자체인줄을 몰랐읍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그디어 이 사랑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읍니다. 『그리스도 친히 죽으시고 친히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생명을 회복해 주셨읍니다』(부활감사송)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부활이 우리의 현실생활 안에 부여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겠읍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인생과 역사에 대한 전폭적인 긍정」입니다. 그리스도 수난하실때와 같이, 오늘날도 선보다는 악이 사랑보다는 불신, 정의보다는 불의가 득세하고 있읍니다. 현대생활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실존주의는, 그리스도 죽음으로 되찾은 인간의 생명을 불신하고 있읍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읍니다. 종국의 승리자는 사랑 그 자체일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것을 증거하고 있읍니다. 부활의 신비가 우리기쁨의 원천, 신앙의 바탕이 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읍니다. 그리스도 부활은 실로 인생과 그 역사에 긍정적인 의미를 주고 있읍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역사의 의미 그 자체이십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과 사랑은 결코 부정적일 수는 없읍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면 그야말로 허무할 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했읍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는 당신의 가르침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이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주시고 있읍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에는 고통과 슬픔은 있어도 부정은 있을 수 없읍니다. 비록 병들고 굶주리고 있더라도 삶의 본질적인 가치는 영원히 남아 있읍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이 부활과 영생의 보장은 바로 절대적입니다.
『환난도 곤궁도 핍박과 헐벗음도…삶과 죽음까지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는 없읍니다. (로마서 8·35~39_
친애하는 교황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같이 우리의 완전한 희망입니다.
누구도 우리에게서 이를 빼앗아 갈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불변의 희망입니다. 우리는 이같이 큰 희망 절대적인 희망을 우리만이 가질 것이 아닙니다. 날이갈수록 삶의 의미를 잃어가는 것 같이 보이는 이나라 사회, 실의에 젖은 우리 동료 형제들에게, 나아가 온세상에 전해야합니다. 부활의 소식은 받을 것만이 아니고 땅극변까지 소리질러 전해야할 복되고 기쁜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신자 여러분!
오늘은 우리의 마음속에 부활을 증거하는 「빠스카」 성촉을 밝혀야 하겠읍니다. 80만신자 모두 한국교회 자체가 이나라 사회를 부활의 빛으로 밝히는 「빠스카 성촉」이 돼야하겠읍니다.
죽은자도 살리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따라 남을 진실히 사랑함으로써 입니다. 끝으로 이 기회에 본 주교의 추기경 피임에 대하여 보내주신 축의와 기구에 충심으로 감사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빌어 마지 않습니다.
1969년 부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