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人間像(인간상) ② 쁘레즈 빠스깔
사랑이 될 수 없는 知識(지식)은 空虛(공허)
理想的人間像(이상적인간상), 精神(정신) · 意志(의지) · 사랑의 결합성취
人間(인간) 고독, 思惟(사유) 없는 宇宙(우주)에 대한 「思惟(사유)하는 갈대」
오늘날은 흔히 빠스깔을 실존주의자의 선구자라고 한다. 이 한마디는 빠스깔의 사상과 현대 사상과의 깊은 관계를 뜻하는 말이다. 빠스깔은 두가지 철학적 동기에 의해서 인간 존재가 이해되어진다고 했다. 「슬픔」과 「놀람」이 그것이다. 인간의 사상사는 이 두개의 동기에서 형성된 사상의 對立이기도 하다.
「놀람」을 동기로 하는 철학은 理知와 推理에 호소하는 까닭으로 해서 이론정연하게 짜여진다. 대체로 철학체계라고 불리우는 것이 이런 방법으로 쌓여진다.
그런데 이런 철학은 이론정연은 하지만 인간의 존재를 깊이 느끼게 하는 힘이 약하다. 아리스토톨이나 데칼트를 이러한 철학의 대표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슬픔」을 동기로 하는 철학은 이지로는 가늠이 안되는 인간의 내면의 신비를 成取하려는데서 이론정연한 체계화는 어렵지만 깊이를 갖는다. 프라토의 철학, 어거스틴의 철학이 이러한 예의 것이다. 빠스깔은 『철학은 자기모순의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철학의 동기는 「놀람」이 아니라 인생의 진한 「슬픔」이어야 한다.』고 했다.
기하학자, 물리학자로서의 빠스깔은 「놀람」을 동기로 하는 사유를 발전시켜 갔지만, 철학자, 신앙자로서의 빠스깔은 「슬픔」을 동기로 하는 사유를 심화해갔다. 빠스깔의 思想系列은 후자에 속한다.
빠스깔의 저서 「빵세」에는 압도하는 깊이와 마음을 요동시키는 감동과 만인에 호소하는 박력이 있고 신념과 정열, 사랑과 분노 연민과 실책이 있다.
빠스깔과 동시대인인 철학자 라이프닛쯔는 우주에는 神이 미리 작정한 훌륭한 조화가 존재한다고 역설했다. 달리 빠스깔은 자연과 인간과의 사이에는 무서운 不調和, 不均衡, 모순과 무한한 격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무한히 큰 세계와 무한히 작은 세계와의 사이에 내던져진 實存이어서 「끝없는 공포와 고뇌에 쌓여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처참은 인간의 사유에서의 내적혼란과 갈등 때문이라 한다. 내적혼란과 갈등은 原罪라는 불행한 사건의 개재에서 생긴 결과이다.
원죄의 사건은 인간을 처참하게 만들었으며 인간은 「王座에서 쫓겨난 王」의 人間像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빠스깔은 인간의 추구에서 物體의 秩序를 파악하여 인간의 불균형, 向死性 불안, 고통을 해명하고 있다. 인간의 처참은 이 세 질서의 不連續에서 결과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唯物論은 정신을 물체의 질서 속에 넣어버릴려고 하고, 觀念論은 정신의 질서에 물체를 넣어버릴려고 한다.
混同해서는 안될 두개의 질서를 혼동함으로 해서 인간의 고독감은 깊어진다는 것이다. 모든 물체, 하늘, 별, 지구와 기타의 제왕국은 정신의 가장 작은 것에도 버금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정신은 이 모든 것과 자기를 알지마는 물체는 아무것도 모르는 까닭이다.
모든 물체를 합쳐도 그것으로는 하나의 작은 思念도 만들 수가 없다. 이상과 같은 두 秩序의관계에서 우리와 세계와이 사이에는 대화와 통교가 끊어져 버린채 침묵과 불연속과 고독이 짙게 감돈다. 결국 빠스깔의 고독은 「사유가 없는 우주에 대한 사유하는 갈대」의 고독이다. 인간이 물체나 정신의 어느 한쪽이면 세계와의 사이에 고독감은 생기지 않을 것이지만 불행히도 인간은 물체와 정신으로 되어 두개이 질서에 속해있는 까닭에 고독해 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독감은 물체의 질서에 대한 정신이 갖는 불연속감이다. 빠스깔의 고독은 이중성을 지닌 인간실존의 의식이다.
그는 일찌기 정신왕국의 내면적 通交의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은 과학적 진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과학적 진리의 高峰에 올라갈수록 인간은 고독해질 뿐임을 알았다. 여기서 빠스깔은 다시 두개의 眞理의 길을 발견했다. 정신과 사랑의 秩序가 그것이다.
정신은 스스로 믿고, 의지는 스스로 사랑한다는 것, 사랑으로 변할 수 없는 학식은 공허한것, 정신이 믿어도 의지가 사랑하지 않는한 진리에서의 통교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랑만이 물체, 저인의 秩序를 通交케 하고, 불안 고뇌 고독의 深淵을 해소해 주는 通路인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믿는 진리와 의지가 사랑하는 진리가 꼭 일치하지 않는 것에 또 비극이 생겨진다.
이러한 비극도 최고의 질서인 사랑의 예수와의 통교에서 극복이 되는 것이다. 즉 절대의 고독자였던 겟세마니의 예수, 밤의 공포 속에서 다만 혼자 아버지인 신의 노여움을 걸머지고 가장 친한 세 친구마저 졸고있는 밤의 침묵 속에서 피땀이 흐르는 고통속에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의 발견, 통교, 만남에서 인간은 물체와 정신, 秩序와의 통교를 새롭게 회복하고 이 원리로서의 사랑의 질서를 갖게된다. 빠스깔의 이상적 인간상은 정신과 의지와 사랑의 결합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이 성취를 위해서 신은 우리에게 은총을 나리신다. 은총은 신의 협력이다. 이의 최고의 형태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예수와의 통교에서 「王座에서 쫓겨난 王」으로서의 인간의 向死性의 심한 의식 실존의 불안과 고뇌와 공포와 전율을 비로소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김영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