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3次 「마닐라」 방문
1841년 가을 고국을 떠난지 어언 6년만에 김대건은 철학과를 졸업하고 신학과를 시작한지 몇개월 안되어 다음해(1842년) 프랑스의 화물선 「에리곤」호의 제독 세실씨가 「마까오」의 「파리」외방전교회 지부를 찾아 한국어와 프랑스어를 할줄 아는 통역을 구했다. 경리 책임자인 리봐 신부는 매스트르 이 신부와 김대건을 통역의 적격자로 알선해 주었다.
그 이유는 「에리곤」호가 마침 한국과 통상을 맺어 보려는 의도에서 한국으로 출항하게 된다는 소식을 접하게된 리봐 신부는 이런 기회에 김대건을 한국에 잠시 보내어 한국교회의 정세와 실태를 조사케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얼마나 좋은 기회였을까? 드디어 「에리곤」호는 「마닐라」를 들렸다가 한국으로 향할 목적으로 2월 15일 「마까오」를 출항하였다 전에 두번씩이나 작은배를 타고 내왕하던 낯익은 바다였다.
전번에는 「마까오」의 민란으로 「마닐라」로 서글픈 피난의 길이었지만 이번은 고국으로 향하는 희망과 기쁨의 길이었다. 며칠후에 「에리곤」호는 「마닐라」 항으로 들어와 「파씩」강변 「퀘손」 목다리 옆에 정박했다.
「에리곤」호가 「마닐라」에 정박하고 있을때 김대건은 메스뜨르 신부를 모시고 전에 두번씩이나 신세를 끼친 고마운 성도미니꼬회를 찾아갔을 것이다. 서투른 길이 아니었으리라. 김대건은 길을 걸으면서 메스뜨르 신부에게 전에 이곳에 와서 기뻤던 일 어려웠던 일들을 말해가면서 길안내자가 되었으리라. 「파리안」성을 통과하고 도미니꼬회 본부를 들어서자 정다운 많은 신부들을 만나 인사하고 메스뜨르 신부를 소개해 드렸을 것이며 지금 고국으로 떠나는 도중에 잠시 「마닐라」에 들렸다고 말했을 것이다.
지금 김대건에게는 「마닐라」가 괴롭고, 피난지였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낯익고 고향과 같은 「마닐라」였을 것이다. 이번이 세번째의 「마닐라」방문이자 마지막 하직의 길이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김대건은 그전 교수신부였던 르그레좌(P. LEGREOIS) 신부에게 그동안의 경과를 알리기 위하여 편지를 썼다. 여기에 그 편지의 줄거리만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르그레좌 신부 좌하 「마닐라」에서 1842년 2월 28일. 공경하올 신부님! 저는 조선을 향하여 출발하게 되었사오매 이 기회에 붓을 들어 신부님께 몇자 글월을 올리나이다. …(중략) … 2월 16일경에 메스뜨르 신부님과 함께 저를 조선으로 가도록 경리부 리봐 신부님이 배정하셨나이다. 이 길이 비록 곤란할줄 압니다마는 천주께서 저희들을 보호하사 무사하게 해주실줄 바라고 있나이다. … (중략) … 「마까오」를 떠난 후에 천주님의 보호로 벌써 「마닐라」에 무사히 입항하였삽고 여기서 필요한 여행준비를 해가지고 2월말경에 출발할 예쩡이옵니다. …(후략)
신부님의 불초한 신자. 김해 김 상서. 드디어 세실 제독은 용무를 다 끝마치고 3월 2일 「마닐라」항을 떠났다. 김대건도 고국의 꿈을 「에리곤」호에 싣고 「마닐라」를 떠나 그리운 조국으로 향하였다.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신부가 된 수선사제 김대건이 「마닐라」에 세차례나 방문하였다. 김대건의 일편단심은 오직 조국을 위하여 달았고 겨레를 구하는데 탓었다. 「마닐라」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이 유적지를 순례함으로써 김대건 신부를 필리핀 나라에 널리 알려주자. 필자도 지금 「마닐라」에 온지 2년이 되었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공부를 하고 있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다.
생각할수록 나의 장차의 책임이 더욱 무거워짐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 본방인 복자 수선사제 김대건 신부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마닐라」 아테네오대학교내 로욜라대신학교에서) <끝>
成應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