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뜨랑제 시절의 한여름] 여행비 두둑한 4個月(개월) 휴가
하숙집 어여쁜 딸과 욧트 즐기다 전복
호화선「홈라이너」號(호)로 즐긴 항해 최고
발행일1969-08-24 [제682호, 4면]
외국유학을 다녀온 이는 다 아는 일이지만 외국에서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4個月이라는 긴 여름방학처럼 즐거운 시간은 없는 것이다.
강의실과 도서실과 하숙집을 채바퀴 돌듯 빙빙도는 단조롭고 지루한 생활을 하다가 학기말시험을 마치면 훨훨나르는 듯한 가벼운 마음으로 미지(未知)의 세계를 찾아서 긴 여행을 떠나는 반가운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약7년이란 외국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여섯번이나 4개월의 여름방학을 즐길 수 있었고 내가 보낸 여름방학은 모두가 흥미진진하고 유익한 연구여행이었다. 내 전공이 사회과학이고 내 관심이 여러 나라 외 협동조합운동을 시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여섯번다 구미각국의 협동조합운동을 시찰하는데 바쳤던 것이다. 내가 1962년에 국제협동조합연맹(F·C·A)의 장학생으로 카나다에 유학했던 관계로 국제협동조합연맹에서는 매년 내가 가고 싶다는 나라로 초청받을 수 있도록 알선해 주었기 때문에 매년 나는 각국 협동조합연합회의하기연구여행 장학금을 받아 풍족한 여행을 할 수 있었고 月當 2백달라의 여비를 절약하면 여름방학을 끝내고 로마로 돌아을 때에는 언제나 주머니에 3·4백달라는 남아있었다.
이와 같이 마음껏 원하던 협동조합운동을 시찰할 수 있고 또 각국의 명승지를 구경할 수 있는데다가 용돈으로 몇백불까지 저축할 수 있었던 나의 하기휴가는 나에게 가장 유쾌하고 기억에 남는 외국 생활의 호화로운 시절이 아닐 수 없었다.
작년 11월말 귀국하여 동 교육연구원의 조사부장직을 맡고 또 서강대학에서 매주 6시간의 강의를 맡고 있는 나는 여러 가지 바쁜일 때문에 금년여름에는 휴가여행도 못가고 지내게 되니 외국에서 보낸 여름방학이 더욱 그리웁게 회상된다. 내가 외국에서 맞은 첫 여름방학은 카나다의 가장 오랜 도시 「퀘백」(QUEBEC)에서 보냈다.
카나다의 수도인 「퀘벡」 시에는 「성로렌스」강이 흐르고 있어 이곳 「알퐁스데쟐딘」 신용조합연맹에서 매월 2백달라를 받고 실습을 하는 동안 나는 매일 강으로 나가 수영을 하였다. 내가 하숙하고 있던 은행지점장과 그의 어여쁜 두 딸과 함께 차를 타고 약20km 떨어져 있는 강변別莊에가서 수영도하고 「보트」놀이도 할 수 있었다.
하루는 내가 이들과 함께 「욧트」를 타고 멋있게 강위를 달리다가 과속으로 인하여 욧트가 전복되는 바람에 물에 빠졌는데 다행히 수영 잘하는 주인 덕분에 물을 조금 먹고 구조된 기억도 생생하다.
내가 「퀘벡」시에서 여름을 보내고 유럽으로 갈 때에는 비행기표를 배표로 바꿔서 7일간 호화선 「홈라이너」를 타고 영국 「사우스햄프턴」함까지 항해했는데 처음에는 배멀미를 할까 걱정도 했으나 막상 2천여명의 승객과 함께 승선하여 지내보니 마치 큰 건물안에 있는 기분이고 조금도 배멀미를 하지 않았고 배안에는 수영장·댄스홀·음악감상실·실내운동·실내영화감상실 등 각종의 오락시설이 갖추어져있고 매일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접대 그리고 배안에서 사귄 친구들 때문에 7일간의 항해생활은 내가 보낸 최고의 「바캉스」였다.
1964년 여름방학은 영국협동조합대학에서 보냈는데 원래 방직공업으로 백만장자가된 영국 부흐의 저택이던 이 대학 「캠퍼스」 안에는 실내극장과 노천극장이 있어 매주 연극을 좋아하는 영국인들과 연극구경을 할 수 있었고 호화롭게 꾸며논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수 있었고 4백 「에이커」나 되는 넓은 영국식 정원에서 「골프」와 「푸딩」 그리고 잔디 「볼링」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이 대학에는 매주 바뀌는 「섬머 스쿨」 학생들이 오는데 모두가 1,300만명의 조합원을 가진 영국협동조합운동의 간부직원들이거나 선출된 任員들이라 많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