採石旅行을 즐긴다. 怪石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江邊의 돌밭을 거닐면서 採石할때의 즐거움을 잊지못하여서이기도 하다. 怪石으로 잘된 것을 고르자면 無數한 돌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熱中하지 않으면 不可한 作業이니 當然히 雜念은 느낄 수가 없다.
雜念이 없으면 無我의 境地도 열릴 수 있다. 事實 誇張된 말이 아니라 採石하는 時間의 나의 熱中하는 품은 時間과 그外의 모든 것을 떠날 수 있는 삼매경에 沒入해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마음에 드는 돌을 골랐을 때의 기쁨 또한 天眞스러우리만치 淡泊한 즐거움이 있다.
親友中에 내가 돌 이야기만 하면 놀리는 분이 있다. 그러나 돌의 境地에 탐익되어있는 것 외에 採石의 기쁨에 빠져버린 또 一面은 모르고서의 일일 것이다.
巫女가 굿을 한다. 一種의 鬼氣를 同伴하여 周圍를 熱띤 空氣로 차게할 때는 巫女의 音聲과 動作, 그리고 精神的 熱中度 역시 凡常한 것이 아니어서 서슬이 嚴하다. 巫女는 巫女대로 無我의 황홀경에 浮遊하는 것 같다. 좋게 보아서 靈의 世界를 넘나드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이것은 精神統一과 雜念의 除去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巫女의 行爲를 시비하기 전에 그 열중을 몰입하는 정신적 자세는 나의 採石할때의 마음과 一脈通하는 点이 있어 興味가 있다. 또 이런 마음은 作家가 製作에 沒頭해 있을때 바람직한 態度이기도 하다.
事實無生物인 紙筆묵을 가지고 生命力을 불어넣자니 범然한 態度로 可能할 것 같지가 않다.
筆者도 製作에 臨하였을때 廢食과 時間의 흐름을 妄却하는 수가 많다. 이것은 반드시 必要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巫女의 일을 생각하여 보아도 그렇다.
이런것을 알고 意識的으로 無我의 境地로의 沒入을 꾀하는 것은 아니다.
일에 誠實하다보면 自然 이런 精神的世界로 吸收되어가는 것 같다.
藝術의 황홀경은 有無交流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永遠한 生命感으로 藝術의 無限感을 얻을 수 있다고도 하였다. 이런것은 作家의 無我적 姿勢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伯牙의 名彈奏는 無我之境에서 伯牙가 거문고인지 거문고가 伯牙인지 모를정도로 혼연일체가 되어 비로소 聽者는 황홀하여 넋을 잃는 것이다.
道敎的 생각에 有無에 대한 것이 잇다. 無는 無限히 有를 낳을 수 있고 有는 반드시 無로 復歸하는 것이니 限界의 갖가지는 有요 無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거니와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다. 크기도 測量할 수 없다. 그러나 無限한 힘이 있어 有를 生成하며 또 有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藝術은 이 有無의 交流点에서 永遠한 生命力을 얻을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藝術의 無限感인 것이다.
사람이 有限의 生涯로 늘 안타까이 여기다보니 奏 始皇 呂政과 같이 不老草를 求하기에 힘쓰던 權力者도 나왔던 것이다.
無限한 것으로의 동경은 여러모로 나타난다. 藝術인들 除外될 수는 없다. 永遠한 生命力 即 藝術의 無限感을 얻자는 것이 窮極의 目的이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어서 神通力에 가까운 天賦의 能力이 아니고서는 不可한 世界로의 指向은 于先 天眞無我의 姿勢로부터 始作되어야 한다.
然後에 天性의 輕重高低에 따라 이루어지는 作家的 作品世界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人力으로 可能한 作家로서의 努力限界를 다할 생각이다. 그러나 나를 決定지어줄 것은 나의 힘 외에 天性的인 나도 모르는 部分이다. 내가 이 생에 타고난 것이 至高淳朴한 것이어서 참된것으로 永遠한 生命力이 깃들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일은 내 생이 終結된 뒤에야 判定될 일이니 짐작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안타깝다.
朴魯壽(東洋畵家 서울美大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