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34) 돌아와서 ⑧
발행일1969-08-24 [제682호, 4면]
박훈씨와 Y교수와의 술이 처음엔 맥주 두병으로 그칠 줄 알았더니 두병이 네병이되고 네병이 여섯병으로 늘어났다. 빈술병이 늘어남에 따라 두 사람의 취흥이 도도해졌고 이야기의 꽃이 무르익어갔다.
이야기는 옆에 현주가 있는 것을 잊은 듯이 목소리를 높혀 이 화제에서 저 화제로 종횡무진으로 넘나들더니 마침내는 직장의 인사문제에까지도 언급이 되었다.
현주는 처음에는 두 사람의 명랑한 이야기를 듣는데 재미가 느껴지기도 했으나 너무 끈덕지게 술을 마시고 보니 진력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현주는 자신에게 차례진 음식을 먹어치웠으므로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현주가 자리를 뜨는 것도 모르고 두 죽마고우는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현주는 방 책장옆에 있는 등의자에 가서 앉았다. 옆에 역시 등으로 만든 탁자위에 신간잡지 한권과 주간지 두어가지가 놓여있었다.
그걸 현주는 뒤적거리면서 아직도 그칠 줄 모르는 박 교수와 Y 교수의 이야기를 귓전으로 듣고 있었다.
(나를 주빈으로 청했다면서…)
무슨 역정으로나 반감으로 뇌여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너무도 다정한 두 교수의 사이를 공연히 샘내는 것 같은 야릇한 심정으로 현주는 입속에서 지꺼리는데
『오셨읍니까?』
방안에 들어서는 청년이 있었다.
『아!』
현주는 놀랐다.
처음 모교에 특강을 나갔을 때 Y 교수의 방에 있었던 두 학생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특강이 끝난 뒤 역시 Y 교수의 방에 쫓아들어와 고맙다고 인사를 하던 학생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어떻게?』
현주는 저도 모르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희 집이예요』
『뭐요?』
『저 박용신이예요.』
『옛?』
현주는 아까 박훈씨 부인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용신이도 늘 말했구요』
(그럼 박훈씨의 아들이었던가?)
현주는 뒷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잠깐 앗질한 기분이기도 했다.
『제방에 가실까요?』
용신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두 교수는 그냥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물론 술좌석과 등의자가 있는 자리사이에는 책장이 가로막혀있어 주의해보지 않으면 거기에 있는 사람을 얼핏 알아볼 수 없게 되긴 했으나….
현주는 조용한 분위기가 아쉬웠다.
『조용한가요?』
『예.』
하더니 용신이는
『두 분이 어울리면 밤새는 줄 모릅니다. 그런데다가 전 두분다 어렵고…』
하면서 복도를 거쳐 자기의 방에 현주를 인도했다.
사실 조용했다. 그건 두 교수의 방약무인하게 떠드는 소리가 조금도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방은 대학생 방답게 검소하게 차려져 있었다.
교과용 이외에도 교양서적이 적지 않게 책꽂이에 끼어 있는게 현주의 마음을 아늑하게 만들었다.
벽에 기대어 바요린케이스가 세워져 있었다.
『앉으세요.』
아버지의 방이 방석을 깔고 앉는 방으로 꾸며져 있는데 비해 용신이의 방은 테이불에 의자였었다. 의자를 권하면서 용신이는
『선생님을 초대한줄 몰랐어요. 알았더면 일찍 들어왔을 걸… 실례했읍니다.』
웃으면서 말했다. 웃는 얼굴이면서도 용신이한테서는 슬픈 것이 풍겨지고 있었다.
(제모가 말하지 않았던 모양이군)
그러면서 현주는 용신이의 얼굴을 천천히 보았다.
박훈씨의 모습이 별로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나 눈 언저리가 그렇다고 느껴졌다.
『금년 몇학년이죠?』
『이학년입니다.』
『이학년.』
8년전에 박훈씨에게 십여세의 아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일이있었다.
그렇게 되었을 거라고 현주는 계산하고
『바요린하세요?』
세워져있는 바요린·케이스에 시선을 가져가면서 물었다.
『예.』
『잘하시겠군요.』
『뭘요.』
하더니
『전 대학들어갈 때 과를 잘못 택한 것 같애요.』
역시 서글프게 말을 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음대로 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바요린 퍽으나 잘하는 모양이군요』
『그런건 아니나… 그 길을 전공으로 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긴 합니다만』
『그래요?』
『지금이라도 전과했으면 싶으나…』
솔직하게 말하지마는 깊은 고민이라도 있는 듯한 것을 현주는 용신이의 말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여기계셨군…』
박훈씨가 변소에 갔다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아들 방에 있는 현주를 발견하고
『어딜 도망갔나 걱정했더니… 자 갑시다』
현주를 일으켜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동안 술이 끝나고 간단하게 식사도 마친 모양 식모아이를 시켜 상을 치우게 하고 있었다. 상을 치운뒤 간단한 과일접시가 들려 들어와 그걸 먹고 현주와 Y 교수는 박훈씨 집에서 나오게 됐다. 현관까지 수척한 부인이 박훈씨와 함께 나왔고 그 뒤에 용신이 나왔다.
『자주 놀러오세요』
부인이 인사했다.
『조섬 잘 하세요』
현주는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