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내가 자네를 청해온 것이 그저 무슨 사무적인 신정 사무적으로 전달하는 그런 마음으로만두 아니지…. 인연이라고 하나 연분이라는 말로 우리나라에서 이야기하지… 내가 만드시 연분이라는 걸 믿는다. 다시 말해 그건 일종의 숙명론(宿命論)인데 그런 숙명론자가 돼서가 아니고…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헤서이지…』
(서론이 길군!)
현주가 이렇게 생각하는걸 아는듯이 Y 교수는
『이거 서론이 길어졌지마는 현주군 자네 박훈이라는 사람 잘알지?』
현주의 눈을 쏘아보았다.
『옛?』
현주는 심장이 꿈틀거림을 깨달았으면서 순간 머리를 수그렸다.
얼른 머리를 들지않는 현주를 보고 Y 교수는
『하하하』
유쾌하게 웃더니
『아느냐고 묻는 내가 어리석지… 왜그러냐면 박군의 얘기로는 자네를 어려번 만난 모양이구 그것보다두 오랜 펜팔이었다니 어련하겠느냐는 뜻이야…』
현주는
(그럼 박씨가 우뭉스럽게 딴 뜻을 품고 나와 사괫다는 말인가요?)
Y 교수를 향해 쏘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랫입술을 윗잇발로 씹으면서 참고 있으려니 Y 교수는
『중학때 동창이지. 박훈군 말이야. 일본에도 같은 시기에 유학을 갔으나 학교는 달랐지. 나는 동경에 있었구 박군은 경도(京都)에 있었으니까 학교뿐 아니라 지내던 곳어 달랐지. 학병(學兵)에 둘다 나가게된 것은 해방후에 우연히 서울에서 만나 안일이지마는… 나는 다시 나머지 공부를 마치고 지금 훈장노릇을 하고 있지마는 박군은 해방과 사전에 혼자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글꺼야. 원체 해방전에는 박군네집은 굉장히 잘 살았거든…(以北)에서지. 그러나 해방 직후 박군 부친이 친일파요, 반동으로 몰려 시달림을 받다가 세상을 떠나고 일찍 장가를 가게된 아내와 함께 겨우 학병에서 귀환한 박군이 월남(越南)했으나, 채 서울에서 발을 붙일 겨를도 없이 사변이었거든… 사변통에 아내를 또 희생시켰지… 원체 섬세한 성격, 예술적이고 내향적(內向的)인 인간이었는데 해방과 더불어 사변에서 아버지와 아내를 잃고 보니 세상이 귀찮았던 모양이지? 그냥, 틀어박혀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말이네. 나도 박군을 못본지가 무척 오래됐는데 두어달전에 그것두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됐지. 대구에서 조그맣게 화상(畵商)을 차려놓고 화구도 팔구 그림을 팔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는 얘기였거든… 박군의 소년시절부터의 성격으로 있을 수 있는 얘기라고 수긍하면서 생각해 보니 뭐 박군같은 사람은 내 짐작으로는 인재(人材)의 한사람임에 틀림이 없어, 이 사람 이제 그만 동면(冬眠)을 하고 땅밖으로 나오는게 어떻겠나 하고 자극을 주고 격려도 해봤지. 처음에는 시들하게 내 말을 듣고 빙그레 웃기만 하더니 몇번 거듭 만나는 사이에 얼었던 마음이 차츰 녹는것 같이 느껴졌어… 그래서 대구에 있지 말고 서울로 올라오라, 박군의 전공이 국제법(國際法)이었거든… 전공은 그런것이었지마는 그것은 그 사람의 아버지가 박군으로 하여금 오문(高文)을 파스케해서 그때의 관계(官界)에 진출시켜 도지사쯤 한자리 하는게 최고 목표였었는데 그 방면에 입학하지 않으면 학비를 대주지 않는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그 과목을 택한거였지. 그러나 중학시절부터 박군은 그림에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말일세…
그래서 서울에 오면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길이 트일 것이고 그림에대해서도 그 취미를 더욱 길를 수 있을거 아니겟느냐고 유인했지. 지금 환도(還都) 직후의 수선한 분위기는 벌써가셨지마는 아직도 대학에서 박군이 전공한 과목의 강의를 시간으로 나맡을 여지가 남아있고, 그렇게 발을 붙이면서 친구들과 함께 무언가 활로를 타개해 보자고 간곡하게 말했지….
마침내 마음이 동하는 모양이었으나 전번에 왔을때 하는 말이 결혼을 해야 되겠다는 것이었지.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대뜸 나도 찬성의 의사를 표시할 밖에 없었지. 그랬더니 박군이 하는 말이 날더러 중매를 서달라는 거야. 그래서 상대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바로 현주 자네가 아닌가?…』
긴 이야기를 현주가 중간에 끼어들 수 없게 쭉 말했다. 역시 교단에 서있는 사람들의 직업적인 화술(話術)인지 모르겠다. 음식이 들려 들어와 Y 교수의 이야기는 잠간 중단되었으나 먹으면서 다시 계속했는다.
『…난 놀랐지. 세상이 넓구도 좁다고… 박군이 자초지종을 털어놓드군… 미술반 전람회의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들었다던가? 사십을 바라보면서도 그 사람한텐 로멘티시즘이 출렁거린단 말이야… 펜팔을 텄다면서? 경회루 앞에서 첫 데이트 했다더군… 머리속에 그렸던 현주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게. 그 사람의 표현을 빈다면 이이다! 이렇게 의치도록 마음에 들었다는거야. 그후 고민이 찾아왔다나? 사실 사변통에 잃은 아내는 무슨 애정으로 맺어진 사이는 아니거든… 그건 나도 잘 알고 증인(證人)이 될 수도 있는데, 박군의 부친이 일종의 정책적으로 혼사를 한 여자였지. 박군 무척 온순한 사람이라 고민도 많았으나 그땐 나이도 어리고 해서 에라 모른다고 부친이 하자는대로 맡겨둔 결혼이었지. 아기가 하나 있었달뿐 부부사이가 아기자기 했을 까닭이 없었어… 그러니까 박군이 그 아내를 잃은후 십년가까이 되지마는 아직도 재혼하지 않은 것도 이번엔 애정을 줄 수 있는 여인 하구라야 결혼하겠다는 생각헤서 였다는 거야. 그 여인을 자네 현주한테서 발견햇다는 거야…』
현주는 더욱 무어라고 말할 수 없어 음식을 먹지 못하고 머리를 수그린채 Y 교수의 말을 듣기만 했다.
『…직접 말을 해볼까 했다는거야, 처음에는… 그러나, 박군 자신은 과거가 있는 사람, 거기에 아이가 있거든, 그쁜 아니라 현주와의 나이이 차가 좀 많다는 반성(反省)이 앞을 가로막더라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단념을 할 수는 없고… 그래서 나한테 숨김없이 자신의 심중을 고백하면서 현주의 의향이나 물어달라는거였어…』
Y 교수는 이제야 대강 할 말을 했다는 듯이 일단 말을 끊고
『사정이 이렇게 된거야.』
그리고 음식먹던 젓가락을 놓았다.
安壽吉 作 文學晉 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