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뜨랑제 시절의 한여름] 수영복 입고 劇的(극적) 單獨(단독) 면회
美術學徒(미술학도)「다리」만나려고 데모하는 판에
발행일1969-08-31 [제683호, 4면]
외국에 체류하고 있는 유학생들에게 1년 중 가장 즐거운 때가 여름방학이다. 나는 65년 프랑스 「빠리」7구에 있는 미술대학 「에꼴데부절」에 입학한 후 해마다의 여름방학은 모두 「빠리」를 떠나 외지에서 보냈다.
경제적 여유가 있든 없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벌써 방학한달 전쯤 되면 학생들 모두의 마음은 피서 여행의 기분으로 들떠 저마다의 여행 「스케쥴」 짜기에 여념이 없다.
68년 8월 초순 예외 없이 나도 3명의 학교친구와 여행길에 올랐다. 우리에게 피서지로 선택된 곳은 세계적 작가 쌀바돌다리씨가 살고있고 피서지로도 이름난 「가따깨스」市였다.
해변가에서 2주간의 캠핑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어느 나라 젊은이도 이룰 수없는 미술학도로서의 큰 꿈을 실현한 기쁨을 독차지했다. 그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 쌀바돌다리씨를 만나려고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많은 학생들 중에서 유독이동양인인 나혼자 그분을 만나 싸인까지 받았다는 사실이다. 쌀바돌다리씨가 만나주지 않는다고 남녀 젊은 학생들은 그집 문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데모 아닌 데모 행진을 벌이기도 했는데 나는 몇일을 별러 생각한 끝에 그집 문앞이 조용한 시간을 택해서 수영복을 입은 채로 그집 초인종을 눌렀다. 무려 1분 이상 계속해서. 그랬더니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는 시끄러운 벨소리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샛빨개진 얼굴로 뛰어나왔다. 그러자 내가 웃으며 인사를 하고 들고간 그림카드를 내밀자 그는 하는 수없이 웃으며 싸인을 해 주었다. 이 극적인 사실을 알게된 학생들은 또다시 그집 문앞으로 밀려가 『쌀바돌다리 쌀바들다리…』하고 고래 고래 소리 질렀다. 그때 나의 기쁨이란 개선장군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그 이튿날 나는 같이 간 친구와 마음이 맞지 않기에 혼자 무전여행을 시작했다. 몇푼 안남은 주머니 돈은 만지작거리다가 아주 다급할 때만 쓰며 공짜로 차타고 「박스로나」와 「자라고자」, 수도 「마드리드」市를 거쳐 서북쪽 「스팡스텐스」까지 올라갔다.
지나가는 거리의 빈차는 모두 내차나 다름없이 손들어 탔고 밤이되면 가장 싼 여관에 들어가 그 값을 절반으로 깎아 지불했다. 물론 학생증을 보이고 사정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서구엔 무전여행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은 이런 것을 보통으로 생각하고 있다. 유료의 박물관이나 공원같은데서 학생증을 내밀고 스페인어를 몰라 잘 통하지도 않는 불어로 겨우 사정을 해서 무료로 입장하곤 했다.
「마드리드」市에 가니 고전건물들이 많이 있었고 돈끼호테 기념관에서는 그가 사용하던 말의 모양과 갑옷을 볼 수 있었다. 스페인 중류이상의 가정엔 모두 자가용차가 있었고 우리나라에 40대 이상의 사람들이 일본말을 하듯이 그곳 중년신사들은 거의 다 불어를 알고 있어서 내가 차를 얻어 타기가 쉬웠고 대접도 잘 받았다.
짧은 머리에 바지를 입고 남자처럼 차리고 다니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의 나를 그네들은 남잔지 여자인지 분간을 못해 어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사주고 또 어떤 사람은 친절히 데리고 다니며 구경도 시켜주며 말을 시켜 여자냐 남자냐 묻기가 일쑤였다. 어떤날 지나가는 추럭을 손들어 탔는데 운전사가 또 여자냐 남자냐 물었다. 내가 남자라고 대답했더니 그는 『남자인데 왜 손이 그렇게 작으냐』고 물었다.
나는 동양인은 남자나 여자나 모두 손이 작고 예쁘다고 말해놓고 그래도 의심적다는 그의 표정을 보며 속으로 『나도 곧잘 거짓말을 하는 구나』고 웃었다.
스페인은 가는 곳마다 한국과 비슷한데가 많았다. 산에 나무가 많지 않았고 포장되어 있는 도로가 얼마 없었고 관광객들을 맞는 관광지역엔 새로 아스팔트와 도로확장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은행에서 돈을 바꾸는데 불화보다 약간 싼 스페인 돈을 비싸게 계산해주는 공공연한 속임수와 거리에서 날뛰는 좀도둑들을 볼 때 한국은 신사의 나라라고 자부심을 가지며 한국의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봤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