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人間像(인간상)] 가브리엘 마르셀
實存的(실존적) 對話(대화) · 만남의 人間像(인간상) 그리고 人間悲劇(인간비극)의 超克(초극)길 暗示(암시)
“信仰(신앙), 知的(지적)물음 아닌 겸손된 渴求(갈구)로”
가브리엘 마르셀의 문학의 특질은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不同性 · 兩極性의 悲劇性을 표현함과 동시에 이것들을 「現存」과 「콤뮤니온」에 의해서 超克하는 길을 암시한데 있다.
따라서 마르셀적 인간상의 생명이 되는 것은 이 「콤뮤니온」과 「現存」의 追求이며, 그의 철학적 遍歷도 어느 의미에선 이러한 추구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敎的 인간상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마르셀은 이 사랑의 공통적인 根底를 「콤뮤니온」과 「現存」이라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견해의 부동성은 단지 「思유의 비극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生命의 비극성」을 낳는다. 劇作에서의 마르셀의 의도가 사유의 비극성에 근저를 갖는 생명의 비극성을 표시하는데 있었다. 마르셀은 『나의 연극은 정배를 당한 영혼의 연극, 자기와 타자와의 마음의 건넴이 없어 고민하는 영혼의 연극이다. 내심의 허위는 나의 연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心交의 결여야말로 사유의 비극성, 생명의 비극성의 참 근저이다. 설령 인생의 어려면에서 혹은 지적인 일에 관해서도 견해의 상이는 있어도 心交가 있으며는 이 상이는 비극화되지도 않을 것이고 생명의 비극도 낳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비극은 사람들간의 心交가 그 허위, 냉혹, 오만, 배신, 불충실, 위선 등에 물들때 일어난다. 이렇다면 인간의 비극은 心交가 없는 타의 존재와의 내적 사귐이 끊어진 고독자의 비극이다. 이 비극은 초이성적인 일치와 조화와의 세계에 통하는 길에서 超克되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조건은 問題와 秘義存在와 所有, 技術과 超技術의 선에서 파악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즉 인간은 자기주체밖에 자기가 처해잇는 상태와 조건을 지닌다.
그것이 문제의 세계이다. 또 인간은 자기의 主體全體의 내면의 현실을 갖고 있다. 秘義(MYSTERE)가 이것이다.
문제의 세계는 소유의 세계이고 비의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이다.
예로 한 친구가 돈백원을 요구할때 주머니를 뒤져 있다든지 없다든지 하여 응할 수가 있다.
그러나 김양을 사랑하느냐를 물을때 그 대답을 위해서 주머니를 뒤져볼 수는 없다. 사앙한다는 것은 나라는 주체의 내면과 같이 소유에 속하지 않고 비의에 속한다. 기술의 세계는 과학적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세계이고 초기술의 세계는 화가적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비의의 세계이다.
인간의 대화 通交는 비의, 존재, 초기술의 선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대화는 물음과 대답으로 이루어진다. 이 대화는 요구 속에 물음이 있고 만족 속에 답이 있는 물음과 답이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답인 만족에서 人生의 지혜가 낳아져야 한다. 아리스토톨적인 지성주의에서의 물음은 지성의 납득을 목적해서 발해지지마는 實在全體의 납득을 구하는 물음이 아니다. 대화는 知性的 대화가 아니라 實存的 對話, 生命的 대화여야 한다. 사랑도 그러한 것이고, 성생활도 일종의 생명적 대화이다. 이렇게 낳아지는 지혜는 하나의 「콤뮤니온」이다. 타자와의 구별을 문제되지 않게하는 사귐이다.
이 지혜는 하나의 능력도 아니고 범주도 아니고 진리의 추상적 파악도 아니다. 사물에 관한 구체적 파악이고 인간들 간에 교황되는 실존적 대화에서 생기는 사귐이며 神의 자유, 神의 思念, 神의 선택과 나와의 사이에 이루워지는 콤뮤니온이 이 지혜이다. 마르셀의 「생명의 약동」 속에서 모색하고 있는 인간고 인간간의 통교, 인간과 신과의 통교는 성서적 사상 위에서의 추구이다. 인간에는 실존적 대화가 있는 만남과 실존적 대화가 없는 만남이 있다.
후자는 지적만남으로 단지 탐지조사로 끝나는 만남이어서 참여가 없다. 진정한 만남은 참여의 만남이어야 한다. 마르셀의 「現存」이란 참여의 만남이다.
참여의 만남은 인간간에 우정을 낳는다. 인간관계는 언제나 「나와 그」에서 「너와 나」로 발전구성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랑의 공존성 창조적 충실이 실현된다. 인간은 「나는 무엇인가」에서 시작하여 「神은 무엇인가」에 도달하게 된다. 神은 客觀化되지 않음으로 신과 콤뮤니온을 갖는 만남만이 神이 무엇임을 해결해 주고 인간의 의미는 더욱 充滿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과의 만남에는 기도가 필요하다. 지성적 물음에 그치지않는 神과의 사귐을 구하는 겸손한 바램, 간절한 구함, 나의 全體에서 발하는 초청이 필요하다. 神과의 통교는 그 충만한 생명, 광명, 기쁨, 사랑에의 참여여야 한다.
神과 나와의 대화와 통교는 기도인 요구에 물음이 있고 은총인 만족에 답이 있다. 은총은 신의 답이고 신의 협력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實存을 超越한 存在의 비의에서 만남을 이루고 절대적 존재에의 참여를 실현한다. 마르셀은 「나는 나그네」(HOMO VIATOR)라 했다. 절대적 존재에의 참여를 위하여 절대적 존재의 사랑의 광명에 이끌리어 遍歷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대화, 만남, 통교를 위해서 존재속에 단숨에 安住한다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다. 다만 날로 깊어가는 參與에 의해서 우리의 存在의 비의가 실현되고 마지막에는 우리의 세계가 아닌 세계에서 실현된다.
金榮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