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35) 분수령 ①
발행일1969-08-31 [제683호, 4면]
요란한 박수 속에 연주회(演奏會)의 막은 내렸다.
현주는 음악이 남겨준 감명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한 채 청중들과 함께 회장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서울 시립교향악단의 가을공연이었다. 곡목은 브람스의 바요린협주곡을 위시한 몇개의 교향곡이었다. 현주로서는 오랫만에 들어보는 고국에서의 음악이었다.
별로 음악에 대해 관심이나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나 그림을 일찍 일요화가(日曜畵家)의 영역은 넘으리만큼 그렸던 현주였으므로 음악에 대해서도 즐기는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귀국 후 공연이 바쁘고 그래서 매말라진 감정을 현주는 오늘밤에는 음악으로 축여보려고 혼자 국립극장에 찾아왔던 것이었다.
역시 음악은 좋았다.
더욱 좋은 것은 브람스의 바요린 협주곡의 잔잔하고 섬세하면서 그윽한 선물은 현주의 가슴에 깊숙히 잦아들었고, 그 가슴을 또 추군히 적셔주었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음악의 감명을 음악에 감사와 함께 되새기면서 복도로 나와 출구로 빠지려는데 「선생님」 굵은 목소리. 돌아보니 박용신군이 아닌가? 박용신군도 음악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선생님도 오셨군요.』
공손히 머리를 수그려보였다.
『아이유 박군」
현주도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박훈 교수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으로 갔던 날에 본 뒤에는 두어주일만에 처음대하는 용신이었다.
그날 용신군의 인상이 여러모로 현주의 머리속에 깊이 박혀있었으므로 덥썩 손을 쥐고
『아 반갑네요.』
입에서 나가는대로 말을 했다.
박용신군은 그저 벙글벙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자, 얼른 나가자구.』
둘은 극장건물 밖으로 벗어져 나왔다.
『어디가 차나하면서 이야기하지.』
현주는 밖에 나오니 더욱 박용신군에게 정다운 심정이 되었다.
『차요?』
『아직 시간 있으니까!』
『그럭 할까요?』
그리고 용신군은
『제가 앞장서지요.』
아마, 자신이 현주에게 차를 대접하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용신군이 인도한 곳은 「샹젤리제」였다. 젊은 쌍쌍들이 그들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비교적 아담한 다방분위기였다.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지요?』
현주는 자리를 정하고 앉자, 이렇게 물었다.
『예, 학교에 잘 나갑니다.』
『호·호. 그야 그렇겠지마는… 아버님께서는?』
『여전 하십니다.』
『여전?』
『술 말입니다.』
『그래요? 그렇게 약주 즐기시나요?』
『한 오륙년 전부터 늘어가는 거죠.』
현주는 뜨끔한 심정이었다. 술이 늘어간다는 것과 현주자신과 관련시켜 생각할 근거가 있다면 있을 수 있고 없다면 전연 없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주는 공연히 그것을 자신과 관련시켜 보지 않고는 어쩔 수없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용신군은 그렇지 않는 듯이
『그거다, 우리 젊은 어머니 탓이죠』
비꼬듯이 말했다.
『젊은 어머니?』
『결코 처음 몇해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않기 시작하거든요. 그 후 부터…』
『그래요?』
그리고 현주는
『어머니, 그럼, 오래전부터 않으셨나봐?』
안된 일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부터 아주 버들가지같이 가냘픈 체질이었어요. 그대신 예쁘긴 했지마는 모르겠읍니다.』
용신군은 커피잔을 들어 마시었다.
잔을 놓고 용신이는 벙실 웃어 보인다. 현주는 그 웃는 입가에 용신이 계모와 아버지에게 대한 불평불만이 감춰져 있음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주는 공연히 가슴이 쓰라린 느낌이었다. 그것은 박훈씨가 술로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자위하고 있는 거 아니냐. 그 원인(遠因)이 나한테 있는게 아닐까 하는 자책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 보다는 오히려 용신군이 아버지로부터나 계모로부터 떨어진 고적하고 정붙일데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박군… 아니 용신이랬죠? 용신군이 외로운 처지에 놓여있겠군』
현주는 마음속에서의 상념이 입으로 이렇게 표현되고 말았다.
『뭐 외로운 처지랄건 없으나… 뭐, 그렇구, 그렇지 뭡니까?』
용신군은 그런 이야기를 깊이하기 싫은 모양 화제를 지금 듣고 나온 음악에 돌렸다.
역시, 바요린을 켜고 있고 전공을 악으로 돌렸으면 싶다고, 전에 만났을 때 이야기한대로 용신군의 음악에 대한 감상은 무척 높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화제가 음악으로 전환되면서부터 용신군의 얼굴에는 슬픈 빛이나, 우울한 그림자가 가셔졌고 목소리도 열띄어 지고 있었다.
눈도 반짝 반짝 빛나고…. 현주는 그런 용신군이 귀엽다고 할까, 믿음직스럽다고 할까, 분간 못할 호감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능한 청년인데!)
그런 심정으로 다방에서 나와 갈라진 뒤 며칠 지나서였다.
일요일이었다.
용신군이 현주네 집에 찾아왔다.
『아이유 용신군.』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와요.』
용신군은 서슴치 않고 밤에 들어가 둘은 마주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