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救世史(구세사) 교실] ⑨ 바벨塔(탑) 이야기
聖經太古史(성경태고사)
바벨塔(탑)의 敎訓(교훈)과 70數字(수자)의 意味(의미)는
발행일1969-04-27 [제666호, 2면]
古代 메소포타미아의 層塔이나 에집트의 「피라미트」는 그당시의 사람들의 건축 토목기술이 얼마나 발달하였으며 또 거창한 일을 하려던 그들의 욕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말해준다. 바빌로니아의 어떤탑은 한 邊의 길이가 90m씩이나 되는 正方形의 底面 위에 높이 역시 90m나 쌓아올린 거대한 탑이었다. 이집트의 케오프스왕(기원전 2625년경)의 피라미트는 그 밑면의 각 邊이 장장 230m씩이나 되고 높이는 무려 146m나 되었다.
성경저자는 고대 기술문명의 이 놀라운 기념물들을 잘 알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그와같이 거창한 일을 한 사람들의 정신상태까지도 看取하고 있었다.
즉 성경 저자는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바벨」탑에서, 자기힘에 도취하여 「우리 이름을 떨치자」고 외친 오만한 인간들의 행적을 보았고, 또 그들이 건설한 도시에서는 한곳에 모여삶으로써 자기네 세력을 결속시켜 끝없는 영화를 우리려는 교오한 의지를 간파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소위 기술상의 「업적」들에는 흔히 「힘」과 「교만」이 한데 얽혀있는 경우가 많다). 성서학자 융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대근동문헌을 통틀어 유일무이한 이 「바벨」탑 이야기는 어떤 긴 역사가정을 짧게 줄인 이야기인듯하다. 짐작컨대 참된 하느님을 잊고 한없이 세력을 확장하며 불손하고 배신적인 야욕을 충족시키는데 급급했던 어느 異敎王朝의 흥망성쇠를 간단히 극적으로 요약한 것 같다.』고 따라서 「바벨」의 언어 혼란 이야기를 근거로 언어의 자연발달과정을 否認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마디로 바벨탑 이야기는 神에 대한 인간사회의 반역을 劇化한 상징적 비유이다. 오늘날에도 인간은 가끔 그 集團力을 偶像化하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 공산국가들은 바로 현대판 「바벨탑」이다.
성경은 「바벨」탑 이야기 전에 대홍소 후의 노예와 그 아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창 9 · 18~29), 가나안땅은 야훼께서 특별히 당신백성에게 선물로 준 聖地였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은 그약속의 땅에서 가나안 사람 및 필리스떼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가? 더구나 왜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노예신세가 되어야 했고 왜 필리스떼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는가? 성경저자는 이 수수께끼같은 관계를 하느님이 그 조상들에게 내린 심판(노에의 축복과 저주)의 결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성경은 인류분포 상황을 槪述하고 있는데 성서적 세계관과 고대 근동의 불완전한 인종학적 개념이 반영된 기록이다. 「아들」이란 말은 혈연 관계뿐 아니라 영토적 · 문화적 · 정치적 종속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알아들어야 하고 인종수 70이라는 수도 「全體」를 나타내는 상정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후에 모세를 보좌한 장로들도 70명이고, 예수께서 전교차 파견하신 제자들도 70명이었다. 얼마전가지 가톨릭교회의 추기경수가 70명이었던 것도 성경의 이러한 기록들에 의거한 것이다.) 요컨대 성경의 인류 분포도는 인류가 서로 형제임을 드러내는데 그 깊은 뜻이 있다 하겠다.
「바벨」탑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세메어부터 아브라함에게 이르기까지의 족보」기사는 5장의 조보와 같이 오랜 세월의 흐름을 나타내고 인류를 번성케 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표상하는 동시에, 太古史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결시키는 고리의 구실을 하고 있다.
족보기사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대홍수 후 290년만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있다. (各세대가 아들을 낳앗을 때의 나이를 전부 합하면 이런 숫자가 나온다, 즉 35+30+34+30+32+30+29+70=290_
그리고 아브라함은 75세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란」을 떠났다고 했다 (창 12 · 4) 290년에 75년을 합하면 365년(양력 일변의 날수와 같다)이 된다.
이것은 한 周期의 끝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周期의 시작을 나타낸다.
정녕 인류역사는 아브라함과 더불어 「구원으로 이끄는 하느님 계획의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즉 大回復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