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路에 파묻히는 孤獨 숲 사이에 草家에 鄕愁는 피고』 한밤중 낯선 村驛에 내려 손가방 하나를 든채 호젓하게 온 몸에 다가오는 외로움을 삼키면서 불빛이 반짝이는 旅舍를 찾아가는 발길은 바다속 같은 沈默이 나를 이끈다.
이 時間이 내게 있어서는 가장 소중하고 幸福하기까지한 때다. 그것은 이러한 時間이 내가 내 人生을 생각하게 하고 그 생각하는 思索 속에서 詩가 胎生되기 때문이다. 『人生은 過客이요 光陰은 逆旅』라고 한 太白의 詩句도 이러한 心情에서 自嘆한 共通되는 詩人만이 體得할 수 있는 孤高한 時間일시 문명하다.
돌이켜보면 내 半生의 人生은 태반이 여행이나 더나고 싶으면 언제나 뚝떠나서 驛 待合室에서 갈곳을 決定하고 표연히 차에 오르는 습성은 지금도 못고치고 있다.
낯선 山川과 낯선 風物과 낯선 아지랑이와 낯선 돌다리와 낯선 樹木에서 神秘스러운 情緖를 느끼면서 그 樹林間에 잠든듯 숨어있는 草家에서 童話같은 鄕愁가 피어나는 平和한 村落을 접어들면 구수한 사투리 구수한 人情 수수한 얼굴 수수한 옷차림이 百年知己인듯 情답고 親近해 오는 素淡한 맛은 내 旅路에서 얻는 가장 즐겁고 多情한 일의 하나다.
나는 내 주머니가 허락하면 儒城溫泉이나 海雲臺나 俗離山이나 西歸浦 같은 名勝地를 찾지만 그렇지 못할때는 서울 近郊로 쳐져서 望月寺나 道峯山이나 牛耳洞이나 千戶洞 藥水터 같은데를 찾아가서 하루 이틀 山莊에 묵으면서 詩를 出産하기에 陣痛의 苦를 꼽박 새우고 난 밤이 밝으면 旅情의 孤獨이 파란하늘 가로 人生의 기쁨을 끌고 飛翔하는 沈默의 神秘를 體得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 詩가 모두 旅程의 所産만이 아님은 물론이다. 내 人生의 孤獨을 旅行에서 自慰하고 孤獨의 思索이 나로 하여금 詩를 안쓰곤 못견디게 한 思想의 境界뿐이다. 단지 旅行은 人生을 생각케 하고 詩를 생각케 하는 浪漫의 沈默일 뿐이다.
나는 旅行을 좋아하는 사람의 하나이지만 團體旅行을 싫어하는 사람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혼자 떠나고 혼자 돌아오는 내 괴벽스러운 性格은 아무도 말릴 수는 없으리니 그것이 말하자면 運命的인 내 고독일지도 모른다. 그래선지 내 고독과 함께 살아온지 19年에 남은 것이라고는 恨과 詩와 人生만이 여위어가는 초생달처럼 앙상한 가지끝에 파랗게 걸려있을 뿐이다.
내 일찍 靑春을 濫用하던 젊은 時節의 詩篇들은 황덕불 같은 感情을 주체 못하여 때로는 폭포와 같은 情怒로 人生을 自處하기도 했고 때로는 知性과 感性의 思惟的 葛藤으로 悟惱의 接境에서 내 哲學의 無智함을 축척하기도 했었거니.
그러나 지금의 나는 내 人生을 節約해야할 時期임을 깨달았다. 첫째 感情이 整理된까 觀照가 整理되니까 詩語가 重量을 加重하게됨을 自認한다. 그러므로하여 나는 樹木에 祈禱함으로 人生은 永遠할 수 있다는 信念을 얻은 후 「祈禱에의 나무」라는 詩를 6·7篇을 써왔다 .나무에 기도를 하자니까 물이 있어야 할 것을 깨닫고 「祈禱에의 샘」을 4·5篇 쓰고나니 自然에 대한 나의 歸依에서 얻은 體得에서 은혜받은 나의 人生과 自然에 대한 不可分의 나의 詩的 哲學이 나의 思想을 바침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나무 한그루와 꽃 한송이가 자라나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 같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이있겠는가 그것을 모르는 곳에 詩가 있을 수 없고 旅行이 없는 곳에 人生이 있을 수 없는 것과도 같이 索莫해짐을 모르고 살 것인가. 都心 한 목판에 樹木이 자라는건 人間世上의 人情같은 것일진대 고독을 싣고 달리는 車窓밖에 울창한 森林이 旅情 속을 흐뭇하게 하는 것은 수유의 人生을 永遠에로 이끌고 가는 大自然 詩人의 姿勢, 그것이기도 한 것이다.
박기원(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