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聖月(복자성월) 시리즈 9월에 꽃피는 나무] ① 새남터
복자성당·紀念館(기념관) 세울 계획
4次(차) 박해에 17명 主敎(주교) 神父(신부) 참수치명 당해
까마귀떼 몰려온 150년 폐허에 紀念碑(기념비)·빈민 아동 위한 공민교
9월은 복자성월.
하느님께 대한 사람을 죽음으로써 후세에 남긴 영웅지명자들을 공경하고 그분들의 전달을 구하는 달이다. 초가을 푸른 밤하늘에 심어진 빛난 순교자의 별들이 옛날 지상에서 그들이 마지막 순간을 복되게 장식한 새남터를 찾아 그 시절 새남터의 모습과 현재 그리고 앞으로 변모될 새남터를 알아본다.
원래 새남터는 나라 역적들의 사형을 집행하던 곳으로서 한강변 허허벌판 백사장의 일부였다. 당시 사형장으로는 서소문밖(지금의 순화동)도 있었지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라고 해서 국가에 모반한 역적만을 이곳에서 죽였는데 죄수의 목을 베여서 군문(軍門)앞에 매달아놓고 만백성에게 구경시켰고 서소문밖에서는 일반 죄인들을 죽였기 때문에 주로 주교와 신부들은 새남터에서 이름나지 않은 신부 일반신자들은 서소문밖에서 사형했다.
새남터의 첫순교자는 1801년에 치명한 주문모 신부다. 중국인 신부로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와 처음으로 새남터에서 참수치명. 그후 38년이 지난 1839년 기해년 박해때 범 주교 나 신부 정 신부(모두 블란서인) 등 4명이 또한 이곳 새남터에서 순교했고 1846년 한국인 첫신부로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새남터에서 치명했다.
그 후 2차례나 새남터에서 치명의 영광이 이루어졌는데 1866년(장 주교 외 7명)과 1871년(3명)으로 모두 5회에 걸쳐 17명의 주교신부가 순교했다.
한국천주교의 씨앗이 뿌려진 성지 새남터는 피비린내를 외면한 문안 사람들과는 멀리 동떨어진 채 수많은 세월 속에 한갓 까마귀떼 모여드는 폐허로 버려져 있다가 1939년에 발족한 순교자현양회에서 성지로 거둘 것을 논의했다.
그러나 당시 일제하 총독부의 불응으로 현양회의 기능이 마비된 채 새남터는 여전히 폐허로 해방후 1946년 현양회가 재발족하여 근10년동안 현양회가 노력한 끝에 정부와 임대차계약을 맺고 1956년 7월 9일 기념비를(지금 서있는 비) 세우기에 이르렀다.
기념비를 세우고 철조망을 둘러친 새남터가 그때부터야 일반인들에게 거룩한 순교지로 각광(?)을 받고 알려지게 됐다.
현양회에선 기념비하나만이 덩그러니 서있을 뿐 정지작업조차 하지 못한 이곳에 텐트를 치고 국민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빈민자녀들을 위해 공민학교를 세웠다. 학교 이름은 복자공민학교, 복자수도원 수사 2명과 수녀 3명이 나와 완전 무료로 가르치는 복자공민학교엔 매년 3·4백명의 가난한 어린이들이 모여들어 그 땅위에서 배움을 찾았다. 63년 가톨릭구제회 도움으로 작으나마 6개의 교실을 짓고 정식으로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설립인가를 얻어 현재에 이르렀다.
매년 복자축일에나 한번씩 신자들이 찾아가는 정도로 횟수를 거듭하는 새남터는 그 자리에서 순교하신 분들이 복자품에 오르고 1백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예나 지금이나 그 모습이 변할 줄 모르고 있다.
복자수녀원에서는 작년(68년) 4월 3일 새남터를 정부로부터 7백70만원에 불하 맡았다. 불하된 총평수는 1천1백평 현재 둘러친 담이 동쪽으로 약3m 동서쪽으로 약2m정도 늘어나게 된다. 이 땅을 수도원 소유지로 확보한 복자수도원에서는 앞으로 새남터에 성당과 복자기념관 복자회관을 지을 계획으로 있다. 복자공민학교 방향으로(67년 8월 27일) 새남터담안은 구석구석 이름모를 잡초들이 무성할 뿐 「가톨릭순교성지」라고 쓰여진 기념비 옆에 작년에 복자수도원에서 세운 복자 김대건 신부 석고상이 쓸쓸히 서있을 뿐 주위의 시끄러운 소음에서 변모될 새남터의 모습을 그려본다. (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