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36) 분수령 ②
발행일1969-09-07 [제684호, 4면]
용신이의 얼굴은 불그레져 있었다. 술을 마신 것은 아닌가? 현주는 그렇게 보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하지 않고 현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용신이 무언가 몹시 흥분하고 있는 듯하므로 잠깐사이 마음을 가라앉혀준다는 배려에서였다. 이윽고 현주는 과일 접시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용신이는 머리를 수그리고 앉아 있다가
『선생님』
과일접시를 놓고 먹기를 권하는 현주에게 격한 어조로 발음했다.
『왜 그러지?』
부드럽게 응수해주는 현주.
『저 집에서 나왔어요』
『뭐요?』
『견딜 수 없어서요』
『그게 무슨 말이요?』
『싸왔어요』
『싸우다니?』
『아버지하구 싸왔어요』
『아버지하구?』
『당장 나가라구 했어요』
『누가?』
『아버지지 누구겠어요. 』
『아버지와 싸우고… 아버지가 나가라구?』
『그날 밤이었어요. 선생님을 음악회에서 뵙던 날… 집에 돌아가니 아버지는 또 술을 마시고 있었어요. 아마 어디서 마시고 들어온 모양인데 고시간에 주무셨으면 그만 일거지마는 또 술상차려 오라는 거야요. 식모아이가 술상을 차려드렸던 모양이죠.
이런 경우 젊은 어머니라는 사람은 물론 몸이 편치 못하기도 하겠으나 끄떡도 하지 않는 겁니다. 아버지는 혼자서 아마 흠뻑 마신모양이죠. 제가 들어갔을 때에는 굉장히 취해 있었어요. 아버진 어디 연회가 있던가하는 경우 밖에서 거나하게 취해 들어와서는 얼른 자리에 들지 않는 버릇이 있어요. 꼭 집에서 술을 더 마시는 것입니다. 양주가 있을 때에는 그걸 몇잔 「스트레이트」로 마시지마는 없을 때에는 소줍니다. 마시고는 혼자서 알아들을 수 없는 푸념을 하고 노했다가는 명랑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그는 나를 깨워 까닭없이 야단을 치기도하고 공연히 추켜세워 주기도 하고! 떠들석 하지요. 그랬는데 그날밤은 식모의 말을 들으면 어디서 벌써 거의 곤드레가 되어 들어온 모양인데 저를 찾더라는 겁니다. 물론 젊은 어머니라는 사람은 그럴 때면 더욱 숨죽은 듯 아마 방문을 안으로 걸고 있는 척도하지 않는 거죠. 그러니 아버지는 저를 찾을 밖에 없지요. 그랬는데 제가 없었거든요. 이놈의 집엔 사람새끼 한마리도 없나? 쌍스러운 말이 나오면서 식모아이에게 술상을 보아오라는 불호령이었다는 겁니다. 식모아이가 벌벌 떨면서 상을 보아갔겠지요. 역시 혼자서 쭉쭉 마시면서 그 알아들을 수 없는 푸념질과 욕설을 늘어놓고 있는데 제가 들어갔어요. 마침 잘 만났다고 저를 붙잡고 야단인겁니다!』
용신이는 흥분된 어조로 쭉 단숨에 내려 이야기했다.
『그랬어요?』
현주는 무거운 것이 가슴에 내려 덥히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너 이놈 어디가서 뭘하고 왔느냐? 여자하고 데이트하고 오는 건 아니냐? 여자라는 건 요물인거야, 네 얼굴에 그 요물과 이시간까지 함께 있었다고 써있어…』
아마 그 이상의 말을 한 모양이었으나 용신이는 아무리 흥분해도 그말을 그대로는 옮겨놓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용신이는 여기서 말을 끊었다가 이내 이었다.
『…결국 저도 아버지에게 대들었읍니다. 아버지의 그런 생활태도가 통틀렸다고… 그랬더니 너 이놈 당장 나가라고 호령을 하는거 아닙니까… 그러지 않아도 전 우리집 아주 싫습니다. 집에서 나와 어디서 하숙이나 자취를 하는 편이 낫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라 좋습니다하고 그냥 나와 버렸지요…』
용신이는 머리를 수그리고 한참 말을 못하고 있었다.
현주는 오만가지 생각이 가슴속에서 내왕했다.
(박훈씨의 가정생활은 지옥이구나)
밖에서 거나해 들어오면 부인되는 사람이 반겨 맞거나 앵돌아져 맞이 하거나 그래서 남편의 거나해진 기분을 여러 가지 방편으로 누그러 주어야 할거 아닌가? 그러지 않으니 남편은 쓸쓸해 그것도 술의 여운으로 더 술을 마시게 될거라고 현주는 무척 오래 부부생활을 해본 여자처럼 생각했다.
(그 부인이 그렇게?)
초대 받았던 날밤 잠깐 보았던 약골인 박훈씨 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박훈씨를 위해 가슴이 아픈 심정이었다.
(그런데도 박훈씨는 나와 용신이가 음악회 파한뒤에 차 마시느라 시간을 보낸 걸 가지고 뭐라고?… 물론 나하고 차마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한말이 겠지마는…』
용신이가 또 측은했다.
『그래 나하고 차마시느라고 늦었다는 말 아니했던가요?』
현주는 불쑥 말이 나왔다.
『할까하다가 하지는 않았으나 어떤 선생님을 만났다고는 말했읍니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그 선생이 누구냐?고 캔단 말입니다.
캐어들지 않았으면 쉽게 선생님이라고 말했겠으나 너무 따지니 끝까지 말하지 않았읍니다』
『그랬소?』
잘했다고도 잘못했다고도 할 수없는 일이었다.
현주는 머리속이 무덤이 복잡해짐을 깨달으면서
『그래, 그날밤 나와서 쭉 들어가지 않았는가요?』
이렇게 물었다.
『예 친구네 집에서…』
용신이는 말하고 이어
『아무래도 저 집으론 다시 들어갈 수 없읍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과감하게 과도 바꿔 볼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가라앉은 어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