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메 몬세까 記】 10년동안 맑스 레닌주의 지배를 받아온 쿠바교회는 압제의 어려움 속에서도 적응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새로운 양상으로 버티어왔다. 쿠바 정부에서 발표한 것을 보면 쿠바에서 정식 등록된 종교는 가톨릭 · 프로테스탄트 · 정교 · 유태교 · 불교 등을 비롯하여 30여개에 이르는데 그중에서도 쿠바 전통상 가장 강력한 것은 가톨릭교회이다. 현재 쿠바에는 8명의 주교가 있으며 그중 7명이 지난 10년간에 임명된 사람들이다. 다른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전국주교회를 열며 사무국, 전례, 교리, 사목, 성소, 사제, 통신 등 여러 위원회를 갖고있다. 규칙적으로 회의를 열고 자문회도 열지만 공식 발표는 일체 하지 않는다.
지난번 2차 공의회와 「보고타」에서의 성체대회 등 여러대회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사제수는 99명의 제속신부와 1백29명의 수사신부를 합하여 모두 2백28명으로 실제 사목에 종사하고 있으나 주로 「하바나」와 「리오」에 많이 몰려있으며 모두가 본당을 맡고 있지는 않다. (본당수도 사제수와 같은 2백28개이다.) 국적별로 봐서는 80명이 스페인인이고 40명이 유럽과 북미출신, 나머지가 쿠바인이다. 그들은 본당운영, 성사집행, 상담, 가정방문 등으로 일이 힘겨운 형편이다. 10년전인 1959년 당시엔 신부수가 7백23명이었는데 카스트로 정권 3년만에 「하바나」의 마스뷔달 보좌주교에 뒤이어 많은 수가 망명하고 여러가지 압력이 늘어감에 따라 다른 신부들도 쿠바를 떠났던 것이다.
그중 소수가 돌아왔으며 새로 서품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신부가 엄격한 종교활동범위를 넘어섰다고 인정되면 즉시 추방당한다. 1968년에도 베르기인 신부 1명과 쿠바인 신부 1명이 추방됐다. 혁명초기에는 문자 그대로 수백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투옥됐고 추방명령이 자주 내렸었다. 1961년 4월 픽스만(灣) 침공이 유산됐을때 7명의 신부가 한꺼번에 투옥됐었다. 지금은 단 한명의 신부가 영어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는 수년전 비합법적인 怠業을 감쌌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고 그 사건으로 「하바나」에 있는 프란치스꼬회 성당과 수도원이 軍에 占領되어 아직도 못찾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하바나」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 있는 수개 성당도 지금은 혁명완수를 위한 사회주의 「센타」나 창고로 쓰이고 있다.
스페인 출신 E. 산체스 신부는 세칭 제2의 게슈타포로 알려진 쿠바 비밀경찰에 수차체포되어 무자비하게 고문을 당한후 스페인으로 추방되었는데 치료를 받기 위해 정신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다고 한다. 정치적인 음모를 꾸며 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성명서에 「싸인」을 거부한 것이 그의 죄였다.
지난 4월에도 카스트로군대의 총사령관이며 내무장관인 S. 발레는 「하바나」에서 열린 국가 保安會議席上에서 『정부는 국가의 명령이나 안전을 저해하는 어떠한 종교단체라도 보복할 준비가 되어 있노라』고 협박을 했다.
쿠바에는 지금 1백29명의 수사와 1백98명의 수녀가 병원을 경영하기도 하고 정부기관에서 일하기도 한다. 10년전에는 2천4백62명의 수사 · 수녀들이 교회가 후원하는 학교를 비롯한 4백11개 단체를 운영했는데 지금은 학교경영이나 학교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당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쿠바에서의 교회장래에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은 1백8명의 신학생이 사제직을 위해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대한 신학교 건물은 억지이유가 붙어 정부에 압수당했으나 대주교관에서 생활하고 있다.
몇몇 「옵서버」들은 지금 쿠바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을 70만 내지 백만으로 보고 있으며 대부분이 가톨릭이라고 하는데 인구에 비하면 10~15%라고 한다. 각 본당에서는 여러가지 모임과 교리반도 운영하는데 때로 방해를 받지만 성당내에서 하는 것은 대개 눈감아 준다고 한다.
교황청과 쿠바와의 관계는 제2차대전 직후 그대로여서 주교들은 「로마」와 연락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의 외교가 쿠바의 가톨릭교회를 합법적인 상태로 만드는데까지는 영향을 못미치므로 우리는 다시 『쿠바의 가톨릭은 어디로?』라고 반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