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聖月(복자성월) 시리즈 9월에 꽃피는 나무] ② 楊花鎮(양화진)
大院君(대원군) 별장있었던 서울 8大(대) 絶景(절경)의 하나
張主敎(장주교) 外(외) 5位(위) 유해물 展示(전시)
숙웃대에 치명자 목달아 警告(경고)한 곳
聖畵(성화)「영광」史料(사료)없어 製作(제작)힘들었고
절두산(切頭山)의 옛 이름은 잠두봉(蠶頭峰) 또는 양화진(楊花鎭)이라 불렀다. 현재의 양화진성당 자리는 그 시절 서울 문안과 외지와의 통로였던 오진(五津)=노량진·광나루· 동작동·마포·양화진)의 하나로 양화진은 주로 호남곡창으로부터 나라에 조세로 바쳐지는 곡식을 배로실어 들여오는 곳이였으며 또한 강화도로 귀양가는 죄인들이 통해나갔는데 연산군과 광해군도 이곳을 통해 귀양갔다.
그런가하면 절두산의 자연풍경은 서울의 8대 절경중의 하나라 잔인한 대원군도 절두산 바로 옆에 별장을 지어놓고 글쓰기와 낚시로 소일했다. 물 좋고 경치 좋은 양화진이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피의 사형장으로 변하게 된 것은 1866년 8월 불란서 군함이 강화에 정박하고 종함으로 서울을 침범하여 양화진 가까이 올라오다가 관군에게 패해 도주한 후부터다.
불군함이 도주하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대원군이 『서양오케놈들이 더럽힌 땅을 천주학쟁이의 피로 씻으라』는 명령을 내리자 죄없는 수많은 신자들이 9월부터 이곳에서 순교하기 시작했다.
양화진에서 최초의 순교자는 1866년 9월 13일 김마리아 복녀. 복녀 김마리아가 치명한 그 이튿날 김베드로 외 5명이 이곳에서 참수치명한 것을 비롯 9월말까지 모두 10명을 살해했으니 거의 매일 한명씩 군문효수로 처형됐다.
기록상 양화진에서 순교한 분은 모두 32명인데 이들 대부분은 복자품에 올랐고(72위 중) 새로 시복된 24위중엔 절두산에서 치명한 분은 한분도 없다.
당시 사형장으로는 제1사형장인 새남터와 제2사형장 당고개(지금의 용산서 자리) 제3사형장 서소문밖(지금의 순화동) 그리고 제4사형장으로 양화진 4군데가 있었는데 양화진에서의 사형방식은 나루길가에 숙웃대(땅에 장대를 박아 목을 매달기 좋게 만든 것)를 세우고 치명자의 목을 달아놓고 행인에게 천주교를 경계하게 하기도하는 한편 양화진 산정에서 교사한 후 그 시체를 투장하기도하고 또는 비참하게 산채로 꽁꽁묶어 강물 아래로 차던져 죽이기도 했다.
대원군 한사람의 입에서 떨어진 말한마디로 옛 선비들이 속세를 잊고 풍류로 소일하던 절경의 양화진이 무고한 신자들의 목을 자르는 절두산으로 변했고 이로 인해 오늘의 한국이 치명자의 후손이라 자부 하게 만든 이 거룩한 동산 절두산은 원래 趙泰煥씨의 사유지였던 것을 1956년 12월 7일 순교자현양회에서 1천3백60평을 매입하여 1967년 10월 22일 오늘의 복자성당과 기념관을 세웠다.
순교정신의 상징과 한국적인 토착성, 전통적인 고유미를 살려 건축하였다는 복자성당과 기념관엔 장 주교 외 15명의 치명자들의 유해와 유물을 전시하여 순교자들의 고귀한 얼과 용덕을 흠모하고자 찾아오는 참배자들의 줄이 끊일 사이가 없다.
작년 10월 3일 24위복자시복식을 기하야 전시관에 1천호짜리 성화「영광」이 걸려있는데 작자 정창섭(서울미대) 교수는 「영광」은 현실적 상황으로 설명 불가능, 지역적으로 모두 떨어졌을 뿐아니라 그 상황과 모습 역시 치명자 개개인 모두가 틀리고 또한 편태당하던 그 상황을 묘사하는 동시에 후세에서의 영광을 나타내야만했기 때문에 반현실적 반추상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천호의 거대한 작품을 시간에 쫓겨 2개월 동안에 완성하는 데는 여러 가지 애로가 많았지만 특히 천사에게 한국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한복을 입히는 것과 수집안된 복자들 모습을 여러 가지 문헌을 보아 나이와 성품을 가지고 그 모습을 정하는데 애로가 컸다. 그림 맨 아래 부분에 깔린 검은 빛갈은 죽음을 나타내고 그 위로 약간 짙게 채색된 붉은색은 수난·편태·피의 상징이며 위로 올라가면서 연하게 두른 녹색은 희망을 뜻하는 동시에 천국에서의 평화를 나타내며 윗부분에 밝게 비친 노란색갈은 순교자들의 영광을 의미한다고 作者 정창섭 교수는 「영광」을 설명한다. (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