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宗敎觀(종교관)] ㉖ 宗敎(종교) · 科學(과학) 分野(분야) 서로 달라
狹量(협량)한 宗敎人(종교인), 分派助長(분파조장) · 自體冒瀆(자체모독)
並立破壞(병립파괴)않고 協助深化(협조심화)
발행일1969-05-04 [제667호, 4면]
再昨年에 機會가 잇어서 六日爭直後의 이스라엘을 訪問했을때 「베틀레헴」을 찾았고 「바티깐」도 가보게 되었었지만 나는 敎人은 아니다. 宗敎欄에 記入할때는 언제나 「無」를 써넣으면서 宗敎에 억매이지 않은 自由를 다행으로 느껴보기도 한다.
科學者라고 해서 無神論者일 必要는 없지만 宗派에 억매이는 混亂은 科學的思考에 影響을 줄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 憂慮도 해보는 것이다. 宇宙의 질서나 合目的性의 前提 없이는 自然科學은 成立하지 않는 것이니 科學도 一種의 宗敎인지 모른다.
數千年前의 일을 그대로 傳承해오는 宗敎의 순수성에는 경탄도 해야할 일이겠지만 科學文明의 發達로 宗敎의 神聖이 모독된다고 생각한다면 「넌센스」이다.
試驗管 속에서 生命의 創造가 可能해진다면 宗敎는 어디로 갈 것인가?
物質을 다루는 것이 科學이요, 生命을 다루는 것이 宗敎라고 分業的으로 생각해온 習性은 지양되어야 할 時点에 와있다. 宇宙時代의 宗敎는 변모해야 할줄 안다.
科學이 宇宙創造의 過程을 밝혀나갈때 宗敎가 그 발판을 잃는 것은 아니다.
社會構造의 變動으로 道德觀이 변천할때 종교는 保守的으로 古來의 說敎만을 되풀이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數千年前에는 永世不變인 것으로 믿어졌던 것이 오늘날에는 核分裂도 일으킨다. 金이 銅으로 變한다면 가치관 自體도 변천하게 되는 것은 自明한 일이다.
宗敎가 차지한 領域을 科學이 侵犯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일 것이다. 科學은 侵略者가 아니요 親近한 同盟者이다. 宗敎는 스스로의 땅을 내주어서 科學을 도와주어야 하겠는데 一部 狹量한 宗敎人은 千年傳來해온 自己땅에 지나친 執着을 가지게 되는 수도 있는 것 같다. 바로 이 狹量이 宗敎를 모독하는 分派行爲임을 自覺 못하나 보다.
宗敎의 매력은 人間의 狹量을 깨우쳐주고 大悟의 境地로 引導해주는데 있을터인데 自然人의 狹量이 人間的 過誤를 되풀이 시키는 것을 人類의 슬픈 歷史가 보여주고 있다. 科學의 世界는 그 点에서는 明快해서 좋다. 人間의 過誤를 電子計算機는 親切히 指摘해 준다.
옳은 것만이 옳고 不正도 不義도 번식할 수 없는 科學의 風土는 청렬해서 좋다.
自然人인 科學者가 어떠하던 科學自體에 不正의 影響을 줄 수는 없다. 科學의 歷史에는 污点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近代的인 科學精神이 宗敎의 彈壓 속에서 싹텄다는 슬픈 事實을 宗敎人은 想起해야 한다.
科學文明의 惠澤 속에서의 宗敎가 어디를 指向할 것인지 두고보아야 하겠다.
自動車를 拒否하는 종교도 있고 「재즈」音樂을 導入한 宗敎도 있다고 들었다.
이런 實驗들이 어떠한 結果를 가져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人間을 實驗對象으로 삼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이제 科學의 눈은 物質만이 아니라 生命에게도 들려지고 있는 것이다.
宗敎儀式이 어떻게 近代化될 것이며 形式의 變化가 精神에 어떤 影響을 줄것인지 科學的인 測定이 可能하리라 본다.
「科學과 宗敎」란 現時点에서는 더 以上 미룰 수 없는 切實한 宿題가 된듯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