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37) 분수령 ③
발행일1969-09-14 [제685호, 4면]
현주는 용신이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 숙연해짐을 또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과를 바꿔보겠다는 말은 처음에 하던 것처럼 흥분한 상태로서가 아니고 자신의 일생의 앞길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의논해 오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과를 바꾼다든가 그런 것은 경솔하게 이야기할 수없는 일이 아닐까요』
현주는 용신이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더욱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용신이는 말을 잊지 못하고 머리를 수그렸다. 고민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뭐 그렇게 고민할거 없어요. 그런데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온 이 마당이 아니얘요? 이런 시기에 그 문제를 끄집어내, 과를 옮긴다든가 하는 것은 사태를 더 헝클어 놓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현주는 어디까지나 박훈씨의 가정의 평화를 유지시키면서 용신이라는 젊은 사람의 생각이 지향하는 바를 이루어 주는 것이 마땅한 처사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지금 우리집은 헝클어질대로 헝클어지고 있는 겁니다. 저는 다만 그날밤 아버지와 싸우고, 아버지가 나가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집에서 뛰쳐나왔다고 단순하게만 말했읍니다. 그러나 그건, 선생님에게 공연히 우리집의 지옥같은 어두움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뿐입니다. 그건 다시 그 이상은 이야기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든 제가 집에서 나오고 이 기회에 제가 지향하는 길로 방향을 바꾸어 놓지 않으면 저도 그 지옥의 유황불속에서 그냥 타버리고 말것이고 그 몽치고 얼크러진 실둥치에 휘감겨 옴짝달싹 못하게 될 겁니다. 그건 견딜 수없는 일입니다』
용신이의 목소리는 다시 격렬해졌다.
『…저도 이젠 제 나름의 생각을 가릴 수 있고 제 인생은 제가 스스로 타개해야할 연령이 되고 있읍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그런 지옥을 마련했는지 저는 통 모릅니다마는… 아버지가 마련한 지옥속에 아들이 함께 침몰해 마땅하다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요컨대 전 이번에 용감하게 집을 뛰쳐나온 것을 계기로 다른 인생의 길을 타개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 협력을 선생님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어쩔 수없는 그런 심정으로 선생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현주는 더욱 엄숙한 마음이 되고 있었다.
『…저의 전과(轉科)에 대해 선생님께서 힘을 보태주십시오. 주임교수 Y 선생님은 아버지의 친구가 아닙니까? 저로서는 직접 Y 선생님에게 말할 수 없읍니다. 윤 선생님께서 저를 이해해 주신다고 저는 믿고 있읍니다. 선생님께서 Y 교수에게 말씀해주십시오. 제편이 되어 말씀하실 수 있으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현주는 무어라고 당장 말할 수 없었다. 용신이의 얼굴에 감돌고 있는 현주를 신뢰하는 표정이 너무도 엄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주는
『용신이의 심경은 물론,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어요. 또 전과하겠다는 그 의지도 나로서는 공감할 수 있어요. 그것은 허영이나, 들뜬 기분에서가 아니고 진실로 자신을 파고들어 그 본연의 자태를 알고 그것을 더 닦아 나감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려는 생명의 부르짖음이요, 욕구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전과문제는 내가 Y 교수에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박훈 선생에게도 직접으로나 간접으로나 이해시킬 수도 있겠지요. 그건 그렇지마는 나로서 용신이에게 바라고 싶은게 하나있어요. 뭔가하면 집으로 돌아가라는 ㄱ얘요….』
이렇게 말해 내려갔으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용신이는 가로 막았다.
『그건 안됩니다.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읍니다.』
『그럴까?』
『금방 이야기 한거 아닙니까? 우리집은 유황불의 지옥이요, 창창 얼키고 설킨 실뭉치라고 그 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안된다고 방금 말했습니다. 들어가게 되면 전과 고음악이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는건 불에탄 뼉다구 뿐일겁니다. 그것이 선생님껜 이해가 안갑니까?』
『그렇더라도 집에 들어가야지 우선 아버님이 얼마나 상심하실까?』
『아버님이 상심? 아버지는 괴로움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건 왜?』
『왜 그런 여자와 결혼했냐 말입니다』
『새 어머님에게 원한이 많은 모양이나, 그런 생각은?』
현주는 머리속이 어찔해점을 깨달으면서 말했다.
『계모를 깎아 말하는게 아닙니다. 계모가 본래 약질이긴 하지마는 그냥 춰서지 못하고 앓기만 하는 근본 원인은 아버지에게 있다고 저는 보구있읍니다. 아버지가 변해버린 겁니다』
현주는 다시금 앗질해짐을 어쩔 수 없었다.
용신이는 물론 박훈씨가 현주에게 청혼했던 사실은 모르고 있을 거다. 그것이 여의치 않은데서 받은 상처를 지금의 처와 결혼함으로 어루만지려고 했으나 안되었다. 둘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했다.
현주는 이렇게 추리해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가정을 지옥으로 만든 원인 중의 하나가 현주자신에게 있는건 아닌 가고 다시금 생각했다. 그러나 물었다.
『아버지에게 있다면?』
『확실한건 모릅니다. 그러나 저의 센스로 직감으로 그걸 느낄 수 있읍니다.』
용신이는 거침없이 대답하더니
『그럼 Y 교수를 만나주시겠읍니까?』
따지듯 말했다.
『기회가 있는 대로?』
용신이 가버린 뒤에 현주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몸부림치듯 울었다. 공연한 울음일까? 당연한 울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