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19) 갈림길 ③
발행일1969-05-04 [제667호, 4면]
휴일이라서 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산은 젊은이만의 친구는 아닌듯, 오륙십대의 노년들로부터 사십대의 장년들과 이삼십대의 청년들, 그뿐이 아니었다. 십대의 중고등학생들도 섞여 남녀의 등산객이 좁은길을 메우고 있었다.
주군과 최군은 정말 산이 좋은 모양, 마치 오래 격조했던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즐겁고 기쁜 심정이 얼굴에 드러나고 있었다.
혜경이와 현주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자잘구레한 상념이 우선은 스며들지 않았다. 그런 마음과 기분으로 넷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상(頂上)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정통 코스를 취했으므로 약간 시간은 걸렸으나, 오르기는 다른 코스보다 편하고 좌우의 경치도 다채로운 편이었다.
이제 겨울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았다. 포근 포근한 햇빛이 오히려 등을 뜨겁게 쏘아주어 쾌적한 기분이었고, 얼굴에 와 부디치는 싸한 초겨울의 차가운 공기의 감촉과 더불어 말못할 쾌미를 맛보게 했다. 넷이 모두 그랬으나 현주는 더욱 그런 느낌이었다.
며칠동안 머리속을 번거롭혔던 일이 한꺼번에 날라가 버리고 그저 머리속이 환해지고만 있었다. 순수한 상태였다. 백지의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야 오랫만에 오니 참 좋구나.』
오히려 혜경이는 말수가 적었으나 현주는 무언가 자꾸 지껄이고 싶어졌다.
『그래? 거참 좋은 현상이구나.』
혜경이도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좋은 현상?』
『너 꽁한 계집애가, 와 놓고는 온걸 후회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후횐 누가? 후회할거 왜 왔겠어 얘두 참…』
그러다가 현주는 돌에 채이고 말았다. 옆으로 쓰러졌으나, 구울러 떨어지는 그러한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내 은근히 옆을 떠나지 않고 호위하는 것처럼 걷고있던 최호진군이 얼른 일으켜 주었기 때문이었다.
현주는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수 없었다. 혜경이는 몰라도 남자들 앞에서 쓰러졌다는 사실이 공연히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최호진이의 도움으로 일으켜졌다는 사실이 부끄러움을 지나 창피하게 여겨졌다.
『다친데 없어요?』
최호진은 친절하게 물었다. 무릎이 좀 아플뿐, 그렇다고 슬렉스를 걷어올리고 상처의 유무를 검사할 수도 없는 일이라 현주는 그저
『괜찮아요.』 했을 뿐이었다.
『정말 괜찮니?』
혜경이 다구쳐 물었다. 현주는 슬렉스 위로 무릎을 쓰다듬어 봤으나 별로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약을 갖구 왔어요…』
최호진이 룩삭을 벗으려고 했으나
『괜찮아요』 현주가 굳이 말렸다.
그러나 그뒤부터 걷는데 전처럼 능률을 낼 수 없었다. 혜경이 스크램을 짜고 함께 걸었으나 가파로운데는 최호진이 와서 한쪽 팔을 끼고 오르지 않아서는 안되었다.
그러면서도 넷은 정상에까지 올라갔다.
정상에서 넷은 모여앉아 사방을 멀리 내려다 보았다. 오를때마다 느끼곤 하던 가슴이 트이는 심정.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주군은 약혼 후의 첫 백운대 정상이라 현주와 최호진이 샘이 나리만큼 혜경이 옆에서 위해주고 소근거리고 있었다. 그 반발로 해서만이 아니었다. 자연히 최호진군은 현주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됐고, 더구나 무릎아픈게 걱정스러워 더욱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현주는 이 자리에서는 「이번 등산에 최호진과 혜경이 약혼자들의 꾸민 연극이다」라는 그런 생각이 떠오를 여지도 없는 터이므로 최호진이 베푸는 친절을 고스란히 받아들였고 묻는 말에 곧잘 대답도 해주었다.
『산을 퍽으나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아니 그렇지도 않아요. 최선생만치는!』
『나? 주군이 끌어다녀본 일이 있는 정도지요.』
『그렇지 않을 것 같던걸요』
『혜경씨가 아마 하늘만하게 얘기한 모양이군요.』
『쟤두 그렇게 말했지마는…』 하면서 현주는 힐끔 혜경이와 주군이 속삭이는 모습을 보았다. 최호진군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싱긋 웃고
『우린 먼저 내려갈까요.』
현주에게 귓속말처럼 발음했다.
둘에게 약혼후의 정상에서의 달콤한 속삭임을 둘만의 것으로 차지하게 하자는 생각임을 알고 현주도 생긋 웃었다.
그러나 불쑥 둘이 먼저 일어서서야 도리어 약혼자들의 애정삼매경을 깨는 것이 되고 말 것이라고 현주는 엉뚱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현주가 일어서려는 최호진의 옷을 잡고 움직이지 말자고 기척을 했다.
최호진도 현주의 뜻을 아는 모양, 일어서지 않고 싱긋 웃어만 보였다.
현주도 따라 웃었다.
둘은 이 장면에서만은 뜻이 서로 통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기 바다가 보이죠』
『예』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최호진의 응수에 따라 현주는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 혜경을 아랑곳 없이 우리둘이 이렇게 이야기에 열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 혜경이 편에서는 무어 약혼자끼리의 애정삼매경에만 잠겨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는 체 하면서 현주와 최호진과 가깝게 해주려고 마음을 먹고 그렇게 실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최와 현주의 대화가 활발해지고 열띠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주, 혜경의 한쌍은 서로 싱긋생긋 뜻있게 웃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