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큉의 神學(신학)과 敎會(교회) 構造論(구조론)
反動神學(반동신학)? 伊(이)「라베니레」紙(지)와의 會見記(회견기)에서
敎皇(교황)·主敎選出(교황)에 信者(신자) 輿論(여론) 参酌(참작)토록
共同性(공동성)은 主敎(주교)뿐 아닌 敎會全般(교회전반)에 이뤄야
一致硏究(일치연구)로 世界的(세계적) 名聲(명성)
公議會神學(공의회신학)에 크게 寄與(기여)
一致(一致), 한편에 合(합)치는 것 아닌 함께 더 나은 크리스찬되는 것
權威一致(권위일치)와 秩序(질서)위해 必要(필요)
한스·큉 신부는 1928년 3월 19일 스위스에서 출생 「로마」「그레고리안」대학과 「빠리」「솔본느」에서 신학을 전공 「빠리 가톨릭대학」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로테스탄트의 유명한 신학자인 칼·발트의 제자로 그의 「의화론」과 가톨릭신학을 연구한 큉은 1954년 10월 10일 스위스 「바셀」서 신품을 받았고 1957년서 59년까지는 「루체르느」 본당신부를 지냈다. 그후 1960년서부터는 독일의 「튀빙겐」서 교수로 기초신학을 강의했으며 1963년부터는 에큐메니즘(교회재일치)에 관한 강의를 해왔다. 지난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전후해서 그의 의화론, 공의회와 교회재일치, 교회조직론 등 특히 일치에 관한 연구는 가톨릭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에까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며 교황으로부터 공의회 신학 전문위원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스·큉의 사상은 현위치에서는 극단적인 면이 많고 흔히 오해도 사고 있으나 공의회 이후 쇄신의 도정에서 우리에게 반성할 재료를 충분히 제공해 주고 있다. 다음은 한스·큉 신부와 이태리 가톨릭일간지 「라베니레」와의 회견기를 한 것이다. (編輯者註)
【문】 큉 교수님은 때때로 聖像파괴적인 신학자로 간주되는데 자신도 동의하는지?
【답】 별로. 신학자로서의 나의 임무는 어떤 신학적이거나 율법적이거나, 교회학적인 학설을 비판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본래의 「메시지」가 무엇이며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어떻게 설명하며 크리스찬은 어떠해야하며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해서 깊이 반영시키는 것이 신학자로서의 나의 임무다. 이러한 뜻으로 신학자가 할일은 현시대에 있어서의 복음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있다.
【문】 적절히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교수님은 무엇보다도 자극적인 행위인 어떤 행위를 신학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반대로 최근 「꼰칠리움」에 발표된 교수님의 글에서는 「신학적인 변동」이 필요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신학자의 활동을 위한 한계는 무엇인지?
【답】 신학은 극우뿐만 아니라 극좌에도 비판적이어야 한다. 이끌어주는 원칙은 「말씀」 즉 복음의 「메시지」라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교회 내에 주어진 교회학적인 1파의 신학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되며 모든 교회의 신학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확실히 「극단주의자」와 단절되어서도 안되며 우파나 좌파와 단절되어서도 안된다. 그 대신 모든 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며 또 이것이 신학자의 기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으로 교회의 진정한 일치 즉 신앙 안에서의 일치가 복잡한 의견가운데 再성립되기 때문이다.
【문】 교회내의 권위에 대한 의견은?
【답】 많은 사람들은 내가 권위에 반대한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나는 다만 과거의 율법적 형식적 의미의 권위가 교육에서나 교회에서나 정치에서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오늘날은 내적인 권위 즉 인간의 자질, 다른 사람과의 협조, 능률과 능력에 바탕을 둔 권위가 필요하다. 나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참되고 더 나은 권위를 갈망한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교회내의 일치와 질서를 위해 권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권위는 강압적이 아니고 사제직과 도움의 권위며 복음의 권위라야 한다.
【문】 교수님을 두고 가톨릭 신학자중 가장 프로테스탄트적이라고 하는데?
【답】 전에는 가톨릭신학자가 프로테스탄트와 대화만 나누어도 프로테스탄트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프로테스탄트와 대화를 나누어왔고 그쪽 신학자 중에 많은 친구도 있다. 나에게 있어 하나의 학설은 반항적이거나 신「스콜라」학파 신학의 가톨릭입문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된 것이 아니라 복음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원천인 최초의 계시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와 만날 수 있으며 참다운 복음의 「메시지」를 위해 상호비판을 모색할 수 있다.
【문】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의 개념에서 프로테스탄트신학으로부터 받아들일만한 것이 특히 무엇이라고 믿는지?
【답】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많은 선언은 이미 루터에 의해 제안됐던 것이라고 믿는다. 「뜨리넨띤」 공의회는 루터의 적극적인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경우에 이것은 너무 조급히 서둔 루터자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천주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공동체로서, 충실한 회중으로서의 그의 교회의 개념과 봉사직으로서의 사목직의 개념과, 교회내의 깊은 일치에 대한 개념과 다른 확신들이 공의회 훈화에 잘 나타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프로테스탄트 측의 이러한 적극적인 도를 알게 되면 개혁파 신학자들에 의해 파생된 많은 문제들을 비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확실히 그것은 가톨릭이 프로테스탄트가 되는 문제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 함께 더 나은 크리스찬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 교수님의 프로테스탄트 친구들은 교황직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받아들인다면 어떤 형태로?
【답】 프를데스탄트 사이에서도 교황에 대한 의견은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 23세 때부터 시작하여 프로테스탄트사이에 수위권의 개념에 대해 더 이해적이고 더 동정적인 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은 무류권의 성서적 역사적 근거와는 관계없이 명예수위권의 의미에서 뿐만아니라 덧붙여서 율법의 수위권 사목적 수위권 즉 모든 그리스도교 정신을 위한 靈感의 중심이며 교회 내에서의 대화를 위한 참고 점이며 우주적인 교회의 상징이며 후원자라는 의미에서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중앙집권주의적이 아닌 중심이며 교황주의적이 아닌 교황을 받아들일 수 있다.
【문】 젊은이들은 各 敎派頂上들의 교회일치운동을 비판하는 경향인데….
【답】 우리신학자들은 흔히 허공에 떠있다. 그래서 추상적이다. 우리는 세상이나 오늘날의 인간을 보지 않고 학설을 만든다. 진실로 우리의 교회일치운동은 敎會下的인 문제에만 집중되어서는 안되며 세계의 문제에 돌려야한다.
교회는 스스로 목적을 가져야할 뿐아니라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한 봉사에 방향을 두어야 하며 신학은 구체적으로 더 나은 방법으로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교회가 오늘날 할 수 있는 것을 반영해야 한다.
【문】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젊은이들의 불만의 촛점입니다. 독일에서도 젊은이들이 교회에 들어가 강론자들에게 세세한 질문을 한적이있다는군요. 이러한 논쟁방식을 어떻게 생각하며 그 代案은?
【답】 이 논쟁방법이 항상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흔히 원하는 바를 가려내지 못해 불분명했으며 반발적인 경향을 조장했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자체에 뿐만아니라 이 세상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기를 원한 젊은이들의 의도는 좋았다. 그들은 교회가 할 수 있는 많은 분야에서 활동적이 되길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쟁방식은 비판해도 그 의도는 받아들여야 한다.
【문】 공의회중에 교수님은 이미 공동성에 관해 유명한 글을 쓰셨는데 교수님은 공동성의 범위를 주교직을 넘어서 계속적인 무대로 모든 교회에 이르도록 넓혔읍니다. 이 계속되는 공동성의 무대는 무엇인지?
【답】 공동성은 주교와 사제사이, 사제와 평신자사이에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교황과 주교사이에만 관계되는 문제라는 생각에 나는 항상 반발해왔다. 그 때문에 공동성은 모든 수준에 확장돼야 한다. 이미 이제는 본회의·교구회의·주교대의원회의에서 제안된 공동성실현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나는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세가지 전망을 덧붙이고 싶다. 전세계교회의 평신도 이사회창립과 주교의 선택에 있어서의 신자 성직자의 협조와 주교대의원회의를 통한 교황선거에 있어서의 전교회의협조가 그것이다.
【문】 일반적인 질문은 그쯤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보수적인 신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는지?
【답】 진정한 대화가 가능할 땐 언제나 기쁘다. 내게는 때때로 정말 대단히 보수적인 나보다 더 보수적인 신학자와 신부친구가 많다. 나는 그들 대부분도 착한 뜻과 엄한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다만 두 편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마음이 열려지길 바랄뿐이다. 그러므로 양편에 심각하고 비판적이고 자아 비판적인 대화가 필요하다. 나는 그러한 개방이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거리가 멀지는 않으리라고 생각 한다. (NC 特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