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年(년)의 발자취] 本堂(본당)·敎會機關(교회기관) 어제와 오늘 ⑪ 金泉黄金洞本堂(김천황금동본당)
舊韓末(구한말) 嶺南北部(영남북부) 布敎(포교) 中心(중심)
敎難(교난) 피해온 10餘(여) 家口(가구) 모여 出帆(출범)
社會淨化(사회정화)·一致運動(일치운동)에 先鋒(선봉)
발행일1969-09-21 [제686호, 3면]
민족의 비극 6·25동난時 치열했던 폭격과 포격으로 폐허가 된 김천시가지 가운데서도 유독 황금동 언덕위의 한 붉은 벽돌건물만이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옛모습 그대로 평화로이 서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종각,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짜임새 있고 위엄이 넘치는 이 건물이 바로 1901년 金聖學 신부(아릭수)가 대구 계산동, 왜관 낙산성당에 이어 경북에서 세번째로 설립한 근70년의 오랜 전통을 연면히 이어온 황금동성당이다.
김 신부가 이곳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부임해왔을 때만 해도 전김천시내 인구는 2백호에 1천여명에 불과했고 신자라고는 고난을 피해 한적한 이곳으로 피난 온 10여 가구의 20여명 뿐이었다한다.
이 교난 피난민들 중에는 증조부 증조모 등의 치명자를 낸 金壽煥 추기경의 집안도 있었다고 이 성당과 함께 나서 같이 늙어간다는 孫判祚 翁(70세 스테파노·前김천우체국장)은 말한다.
이곳에 성당을 설립한 당시 金聖學 신부는 현재의 남산공원자리 언덕위에 본당을 짓고자했으나 노인들이 가파른 언덕을 올라다니기가 곤난타고 극구 반대하여 비교적 평지인 이곳에 있던 한식 기와집을 매입, 성당으로 출발케되어 현재 김천시내 최고의 요지에 본당이 들어설 수 있었던 아까운 기회를 잃고 말았다고 孫 翁은 안타까워 했다.
초기 이성당의 관할구역은 성주 상주 문경 예천 선산군 등 5개 군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어서 아직 서양문물이 잘 소개되지 않았던 그 당시, 나귀타고 공소순회 나가는 본당신부를 洋大人이라고 부르며 신기해하는 아이들이 뒤를 따라 다녔다고한다.
金 신부는 교육에도 또한 남다른 관심을 가져 구한말 4년제의 성의학교를 설립, 서양의 신학문을 전함으로써 지방인재양성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한일합병 후에도 학생들에게 계속 민족의식을 고취시켜오던 이 학교는 日人들에 의해 폐쇄되어 조그마한 학원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4대 金承淵 신부부임 후 5년만인 1934년 건평 209평의 붉은 벽돌로된 현재의 성당건물이 건립됐다. 작업복에 작업모 쓰고 직접 현장감독으로 불철주야 공사장에서 고심한 보람으로 착공 1년만에 성당준공을 본 김 신부는 곧이어 성의학원 건물을 착공, 그해 준공시킴으로써 황금동본당의 기틀을 잡았다.
金 신부는 일제말 유기그릇 일제공출 때 日人들이 성당 종을 징발코자 갖은 수단을 다했으나 끝내 이를 거절하고 종을 징발당한 프로테스탄트교회에 자극을 주지 않으려고 종을 치지않은체 지내오다가 해방을 맞아 감격의 종소리를 전 김천시내에 메아리치게 했다.
5대로 부임한 崔再善 신부(요한 現부산교구장)는 日人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어 학원으로 명맥만을 유지해오던 성의학원을 남자부, 여자부의 중고등학교로 부활시킴으로써 초대 김 신부의 유지를 해방과 더불어 되살렸다.
현재 성의중, 상업고등학교에는 5천여명의 남녀학생들이 교장 김성환 신부 지도로 학업에 매진하고 있다.
또 崔 신부는 자라나는 어린 새싹들의 교육에도 큰 관심을 보여 유치원도 설립했다.
6대 주임신부의 자리는 現 金壽煥 추기경이 이어 받았다.
충청도 연산에서 교난을 피해 남으로 내려오다가 이곳에서 30여리 떨어진 金陵군 代項면 香川동에 정착한 金 추기경의 선친은 초대 주임신부를 도와 성당건립에 무진한 노력을 하였으며, 바로 이곳에 사제의 몸으로 부임하여 직접 사목을 맡게 된 金壽煥 신부는 본당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선교활동으로 선친의 뜻을 되살렸다.
그리고 추기경과 주교를 모셨던 이곳 신자들은 큰 자랑으로 기뻐하고 있다.
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보는 한학자인 7대 卓世榮 신부(바비아노·獨人)는 그의 뛰어난 능변과 재치로써 김천 지역사회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또 卓 신부는 매일 10여통씩의 편지를 본국의 친지들에게 보내 그들의 원조로 김천 평화동성당을 건립, 초대 주임으로 부임해 갔다.
1964년 7월, 卓 신부가 별세했을 때에는 전 김천시민이 애도의 눈물을 흘리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설립후 해가 거듭 할수록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오늘에는 1천3백여 가구에 4천여명의 신자를 가진 대 본당으로 된 황금동본당의 주임 자리를 이어받은 현재의 崔命化 신부(베드로·함흥교구신부로 現대구교구소속)는 공의회정신을 다른 어느 본당보다 먼저 실현코자 1967년 4월 평신도사도회를 조직, 모든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평신사도직을 수행토록 노력할 뿐만아니라 교회자치제도를 실시, 신자는 이교회 운영에 직접 참여토록하고 있다.
또한 26세의 약관으로 원산 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한 적도 있는 최 신부(현재 전례위원회 성음악분과위원장, 대구교구음악회지도신부)는 김천에서 두차례에 걸쳐 음악발표회도 개최한바 있고 김천시립교향악단 창설을 위해 그 준비작업을 서두르는 등 음악을 통해 지역문화발전에 기여할 뿐만아니라 나아가서 음악으로 거칠어진 청소년들을 교화시키고 또 김천시내 범종교단체의 체육대회, 목사들과의 공동음악회개최 등으로 교회일치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역대 주임신부 명단
제1대 金聖學(아익수)
제2대 金민국(요셉)
제3대 李약슬(요셉)
제4대 金承淵(아우구스띠노)
제5대 崔在善(요한)
제6대 金壽煥(스떼파노)
제7대 卓世榮(바비아노)
제8대 鄭桓國(알로이시오)
제9대 李慶雨(가브리엘)
제10대 金南洙(누까)
제11대 崔命化(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