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福者聖月(복자성월) 시리즈 9월에 꽃피는 나무] ③ 서소문밖
즐비한 빌딩 성지흔적 없고
한국 첫신자 李承勲(이승훈) 殉敎(순교)로부터 시작
당고개선 敎人(교인) 씨말리려 三嚴(삼엄)으로 처형
1801년(純祖代) 박해가 시작되면서부터 박해가 끝난 1867년까지 근70여년 동안 죄없는 천주교신자들의 시체가 끊일사이없이 널려져 있던 제3사형장 서소문밖은 지금의 순화동 일대, 그중에서도 처명자들의 시체를 버렸던 자리가 바로 순화동 6번지 10호(현재 해운공사에서 서고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
이곳에서 일어난 맨 처음의 순교는 1801년 2월 26일 한국인 첫 신자였던 이승훈 외 5명이었다. 이들로부터 시작되어 그해에 9명 1839년에 34명 모두 48명이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기록상 나타나있지만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교우들이 매일같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열심한 교우들은 들키면 치명할 것을 각오하고 밤마다 야심을 틈타서 벌판에 팽개쳐진 처참한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근처 땅에 다 끌어 묻어 겨우 까마귀의 밥이나 면하게 했다. 목은 목대로 몸체는 몸체대로 마구 갖다버려 어느 목이 어느 몸체에 속하는 것인지 조차 분간 못하게 무더기로 쌓여진 시체 더미에서는 피비린내와 송장썩는 악취가 진동하여 서소문밖 일대엔 까마귀 떼들의 흉칙한 울음소리만 드높을 뿐 인적조차 끊겼다.
당시 사람들에겐 죽음의 장소로 소외됐던 서소문밖, 이 땅에서 세계적으로 자랑거리가 되는 복자 44위(79위 중 41명 24위에서 3명)가 탄생됐다. 한때는 그 자리에 10여층의 기념관을 세울 계획으로 59년 6월 기금 모으기 운동까지 벌렸으나 모금운동마저 중단되고 그 땅은 결국 개인소유화 되어버려 이젠 고층빌딩이 林立할뿐 순교지로서의 옛 형태조차 찾을 길이 모연하다.
그 당시 순교자현양회 책임자였던 윤형중 신부는 『현양회 당시의 설계는 새남터와 절두산을 각각 교회소유지로 만들고 서문밖까지 확보한 다음 건축은 후일로 미루고 대구 수원 공주로 내려가 성지부터 확보할 작정이었다.』고 당시의 현양회 활동상황을 설명하면서 『지금이라도 순화동 일대 어느 땅이든 조금이나마 교회가 성지로 확보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제2사형장 당고개
박해의 절정을 이룬 1839년 기해년. 박해 초엔 죽엄과 온갖 형벌에 억지로 배교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기해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잡혀들어간 교우가 고문에 못이겨 배교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을 뿐만아니라 친지가 잡혀가 참수치명했다는 소식만 들어도 『나도 천주님을 위해 죽겠소. 나를 잡아가 주시요』하고 스스로 포도청이나 관가를 찾아가는 형편이라 문안6개의 감옥(의금부·좌포청·우포청·전옥·형조)이 모두 만원상태였다. 비좁은 감옥을 덜기 위해 가을부터는 신자들을 매일 사형시켰는데 나라에서는 크게 피를 내어 일반백성에게 교인의 씨를 죽엄으로 매달린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특별히 삼엄(三嚴)을 갖추어 당고개까지 끌고나와 죽였는데 당고개는 지금의 용산경찰서 자리다.
이곳에서는 1839년 12월 27일 복자 박아우구스띠노·홍베드로 등 7명 그리고 그달 29일 복자 홍바오로 등 3명 모두 10명이 치명했고 이들 중 9명이 복자품에 올랐다.(79위 중)
시복된 복자 복녀들을 순교지별로 보면 서소문밖에서 순교한분이 79위 중에서 41위, 24위 중에서 3위 모두 44위로서 제일 많고 새남터가 11위로서 두번째로 많은데 79위 중에서 5위, 24위 중에서 6위이며 당고개에서는 79위 중에서 9위 뿐이다.
양화진에서는 많은 분들이 군문효수로 참수치명했으나 79위 시복을 위한 준비조사 때 양화진은 조사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히 양화진에서 순교하신 분 중에는 복자품에 오른 분이 한분도 없다. (吳)
▲지난호 양화진기사 중 「기록상 양화진에서 순교한 분은 모두 32명인데 이들 대부분은 복자품에 올랐고(79위 중)」했는데 양화진에서 순교한 분들 가운데는 시복된 분이 한분도 없으므로 이를 정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