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사람의 행동거지의 척도를 분수로서 가늠한다. 즉 분수는 반드시 한人間의 가치와 연결되는 것으로 『분수에 넘친다』 『분수에 맞다』고 표현할 때 이것은 그 個人의 인격에 『넘친다』 『맞다』 뜻이다. 분수는 인간을 재는 尺度라 할까? 모든 인간사물이 그 이렇듯 이 척도의 單位는 대단히 애매 하지만 실질적으로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善과 惡이 그렇고 美와 德이 그렇듯이 우리는 이러한 實體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런 것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분수란 무엇인가? 분수는 첫째로 한人間의 人格과 관계되고 다음으로 身分, 세째로 才能과 주어진 可能性과 관계된다.
여나문살 먹은 아이가 서른살 어른의 행세를 할려고 들면 분수에 맞지 않다. 백원갖고 해운대 관광호텔에서 1週 유숙하려는 것도 분수에 틀린 짓이고 학교문턱에도 안가보고 공부도 못한 주제에 남의 선생 노릇을 하려고 든다면 분수에 맞지 않다. 대학 4년을 늘고 유명한 학자가 되려는 것도 제분수를 모르는 허욕이다.
이와 같이 분수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다.
우리는 흔히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린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얼마나 우리개인의 생애뿐 아니라 全社會에 미치는 영향이 큰지 모르는 수가 허다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분수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다가 패가망신을 당하는 것일까? 학교는 반드시 대학을 졸업해야하고 어떤 비상수단을 쓰고 학자적 양심을 팔아서라도 박사학위를 획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집은 반드시 洋屋에다 싸롱, 정원을 두고 자가용을 굴려야 되겠고 직업에 있어서도 자기능력의 한계나 適性에 맞든 안맞는 높은 직책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이야말로 「없는 놈이 자 두 치 떡만 즐기는」格이 아닌가. 분수에 넘는 虛勢의 결과는 으레 실망이다. 실망이 쌓이고 쌓이면 절망이되고 절망은 살기보다 못한 것이고 보면 결국 분수없는 행동의 결과는 죽음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분수에 맞게 살 것인가? 옛 聖賢의 말에 『먼저 제 자신을 알라』했다. 참으로 분수에 맞는 것이란 바로 자신을 아는 일이다. 제 자신을 안다는 것은 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란 비범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보통 일을 비범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로 분수에 맞게 살려면 노력이 必要하다. 분수란 固定된 것이 아니고 발전하는 것이다. 엿장수가 평생 엿장수로 남아야한다는 법이 없다. 노력하면 분수를 높일 수 있다. 따라서 보다나은 生業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 가톨릭人에게는 참으로 분수에 넘치는 일이 한번 있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전해주신 것이다. 같은 생명을 가지면 같은 類에 屬하는 法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케 됨으로써 우리 자신이 神으로 昇華되었다. 이렇게 고상한 분수를 받고서 무슨 분수를 또 찾을 것인가?
金 토마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