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38) 분수령 ④
발행일1969-09-21 [제686호, 4면]
현주는 이내 Y 교수를 방문하고 용신이의 부탁을 이행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쩐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용기라기보다 Y 교수를 방문하는 일이 큰 고통으로 느껴졌다. 용신이 말을 듣고 단정 지어지는 것은 박훈씨가 재취를 잘못한 까닭에(용신이의 표현을 빌면) 「가정이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Y 교수를 만나 용신이의 부탁을 전하게 되는 경우 자연히 박훈씨의 가정이야기가 나오게 될 거고 그 이야기를 파고들어 가면 결국은 현주자신이 박훈씨의 청혼을 거절한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빤한 논리다. 그 논리의 귀착점이 현주로서는 고통인 것이었다.
물론 청혼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걸 받아들여야 된다는 법은 없다. 거절할 수가 얼마든지 있다. 거절했으면 그만일뿐 아무책임도 없는 것이다.
거절당한 편에서도 마찬가지다. 달리 혼처가 있어 결혼하면 그만인 것이지, 처음 거절한 이성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거나 그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을 거다.
그럼에도 현주는 박훈씨의 가정지옥에 대해 자신과 관련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없는 건 스스로도 무슨 까닭인지 알 수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 나이에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적어도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이성을 갖고 있지 않는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현주로서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이성으로서는 박훈씨 하나만에게 오직 박훈씨 하나만에게 지금까지의 생애에 있어 마음이 끌렸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구미(歐美)에서의 어려운 환경 속에 학위까지 딸 수 있은 공부에 열중하느라고 오직 그것만에 전력을 기울이느라고 온갖 유혹과 순결한 애정의 프로포즈에도 담을 쌓고 지내온 탓이라고 본다면, 고국을 떠나기 전에 가졌던 그 애정이 현주를 모르는 사이에 불태웠던 애정이었을지 모른다.
어떻든, 현주는 박훈씨의 가정지옥이 나한테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부인하고 그런 생각을 날려 보내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현주를 따라다니는 것이 되고 말았다.
용신이는 이틀이 멀다고 현주를 찾아왔다.
『Y 교수 만나셨읍니까?』
『아직은… 내가 바빠서…』
『꼭 만나주세요.』
그리고 가버리곤 했으나 올 때마다 용신이는 초췌해졌고 볼에서 살이 빠지고 눈이 움푹하게 들어가 보였다. 하루는
『된장을 좀 주세요.』
자취를 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전에 왔을 때 말이 못되게 영양실조 직전의 건강이었다.
『그러지 말구 집으로 들어가라구』
그런 말이 용신에게 통할까닭이 없으며 막상 용신이가 현주의 말대로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현주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용신이는
『선생님도 저를 버릴 작정입니까?』
와락 골을 내고 된장도 가지고 가지 않고 내빼버렸다.
그러고는 얼마동안 용신이는 현주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현주는 용신이를 찾아 나서지 않아서는 안되었다. 전에 함께 하숙을 했다는 학생을 통해 고심 끝에 용신이가 자취를 하고 있는 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월곡동의 어느 다리밑의 겨우 몸하나 들어가 누을만한 방이었다. 어둡컴컴한 방안, 강물에서 오물 썩은 냄새가 재채기가나고 구역질이 나도록 강한 환경이었다.
『이건 무슨 짓인가?』
거지를 방불케 하는 용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마음 편합니다』
극도로 수척한 용신이는 오히려 명랑하게 웃었다.
『마음 편하다니?』
『저녁이면, 바이오린을 켜거든요. 이웃에서들 박수갈챕니다.』
보니 구석에 바이오린케이스가 세워져 있었다.
『이러다간 도리어 타락해요.』
『타락?』
용신이는 흥하더니-.
『꼭 박훈 교수와 같은 말을 하네.』
『아버지가 왔다 갔어요?』
『천당 같은 지옥에서 지옥 같은 천당에 왔었지요.』
『뭐요?』
『와서, 하는 말이 타락한다는 거였어요.』
박훈씨가 왔다갔고 집으로 들어가도록 타이르기도 하고 욱박지르기도 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현주는 다소 마음이 놓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대로 두다가는 무엇보다, 건강이 지탱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말구 나하구 함께 있자구. 우리 집에 빈방이 있어요. 이거 안돼요. 병이라도 나면 아무것도 없는 거니까…』
『선생님 댁에?』
『그래요.』
『선생님 옆에?』
『그래요』
생각에 잠기더니 용신이는 머리를 저었다.
『싫어요.』
『그러지 말구 잘 생각해보자구.』
강요했다기로 솔깃이 들어먹을 용신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현주는 여유를 주고 다리밑에서 나왔다.
(용신이를 밝은 길로 인도하자 거기서 보람을 찾자.)
현주는 용신이를 집에 데려다 방을 제공하고 음악공부를 시킬 것을 결심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러는 과정에서 용신이 스스로의 마음이 풀어질 때에 자연스럽게 이루어 질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결심한 현주는 이제는 Y 교수를 만날 수 있겠다고 마음먹었다.
Y 교수와 전화의 연락을 한 후 현주는 교수의 집을 찾았다. 반겨 마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