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20) 갈림길 ④
발행일1969-05-11 [제668호, 4면]
산정(山頂)에서 마신 호연지기(浩然之氣) 탓이랄까? 주군과 혜경이 섬세하게 신경을 써준 탓일까?
산에서 내려올 무렵에는 현주의 최호진에 대한 태도가 무척 누그러졌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올라갈때와는 다른 코스인 우이동 종점까지를 둘은 퍽 정다운 감정 속에서 내려왔던 것이다.
최호진은 오히려 주군보다 조용한 편이고 소심한 편이었다. 약혼식장에서 보여준 익살과는 반대로 내면에서 풍겨주는 것은 고요하고 소극적인 것이었다.
현주는 우락부락하지 않다는 점에 우선 끌려지는 심정이면서 최호진이 화제를 돌리는대로 끌리어 잘 응수해주곤 했다. 우이동 종점에는 산에서의 귀로(歸路)에 오른 등산자들이 장년 · 소년들로 거의 장터처럼 붐비고 있었다. 택시를 잡을 수는 없고 그럴마음도 없는듯, 모두들 버스를 타기 위해 얌전하게 줄을 짓고 있었다.
현주는 오를때 다친 무릎이 가끔 뜨끔거림을 깨달으면서 그것때문만은 아닌 피로감이 엄습함을 또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현주의 육체상태와 마음을 아는 듯이 최호진군은 더욱 조용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어느 사이엔가 주군과 혜경이의 쌍과는 갈라진 위치에서 버스타는 순번을 가디라게 됐다. 올때에는 고급 자가용을 타고 왔던 그사람들도 돌아갈때에는 여느 사람들처럼 버스를 이용하기로 한 모양, 그대신 극성스럽게 현주와 최군이 서있는데서 훨씬 앞에 끼어서서 역시 혜경이편에서 무언가를 유쾌하게 지껄이는 모양이었다.
아마 새치기를 하러드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주는 그런 광경을 먼발로 보면서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혜경이 극성스럽죠?』
뒤에 서있는 최호진을 돌아보고 말했다. 최군은 혜경이를 보았던 모양.
『재미있는 성격인걸요』
그리고 자신도 웃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둘은 또 소근소근 이야기를 하게됐다. 얼마동안 그러고 있노라니 앞에 버스가 와 멎는 모양, 현주가 앞으로 돌아서서 보았을땐 혜경이네 모습은 벌써 보이지 않았다. 버스는 이내 떠났다. 변변히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혜경이네는 가버렷다.
현주네가 버스를 타게된 것은 혜경이네차가 떠나고도 두번째만이었다. 다행히 먼저 타게된 순서여서 둘은 좁으나마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붐비는 차안이고 다른 청년남녀들이 떠들어대므로 최호진과 현주는 잠자코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시내에 들어왔다.현주의 집이 우이동에서 가까왔으므로 먼저 내릴 차비를 했다. 그러자 최호진도 따라내리려고 했고 차가 정류장에 머물었을땐 현주보다 최호진이 먼저 내렸다.
(집이 이 근처가 아닌줄 아는데…)
생각하면서도 현주는 최호진의 뒤를 따라 내렸다.
『이제 해방됐군요.』
싱긋 웃더니 최호진은 『목이나 축이고 헤어지기로 합시다.』
이번엔 익살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현주는 사실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기운을 차리고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마다고 하지 않고 최호진을 따라 가까운 곳에 있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도심지의 다방에 비길 것은 아니나 조촐한 홀이었다. 들어서니 우리나라 가곡이 볼륨을 낮워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불사의밤」이 한창 소프라노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그 낮은 볼륨의 가곡이 현주의 마음에 들었다.
자리에 앉아 가져오는 엽차를 마실무렵에는 가곡
「내 그리던 옛동산에…」가 역시 소프라노의 낮은 볼륨으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또 현주의 마음을 저도 모르게 어르만져 주는 듯이 느껴졌다.
『참 좋은 다방이네요.』
잔잔한 감회에 잠기면서 현주는 최호진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현주의 심중을 알고 하는 말인지 건성으로 뇌이는 것인지 모르나 최호진도 다방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인 듯 했다.
커피가 들려와서 그 첫 목음을 마실때에도 가곡이었다. 「바우고개」였다. 소프라노의 낮은 볼륨.
『이 다방 마담 가곡 좋아하는 모양이죠?』
현주는 또 최호진을 보고 말했다.
『그런 모양이군요. 가곡 좋아하세요? 현주씨.』
『오늘 이 자리에선 좋군요. 어느편이에요?』
『팝송도 좋아하지만 오늘 이자리에선 가곡이 좋군요』
『그렇다면 마음 놓이지만…』
『그래요』
하더니 최호진은
『알겠어요. 현주씨의 심정을…』
모호하다면 모호하고 의미심장하다면 그럴수도 있는 말을 했다.
『내 심정을요?』
현주는 본능적으로 마음이 가누어지면서 되물었다.
최호진은
『뭐 긴장할건 없고…』
더 말을 계속하려고 하다가 한참 멈췄다. 그랫다가 해야할 말은 하고야 만다는 듯이 발음했다.
『이제 자주 만나 주세요.』
『자주 만나요?』
현주는 또 속으로 웃으면서 되묻고 있다.
『예. 우선 다음주일날 둘이 이번엔 관악산으로 오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다음일요일에?』
『싫으세요?』
『혜경이네와는 약속이 있엇던가요?』
『필요하다면 그건 그렇게 할 수 있읍니다.』
『아직은 아니군요』
『책임지고 주군들도 끌겠어요.』
『책임질 것도 없고…』
『거절인가요?』
『아직 일주일이 남지 않았어요.』
그리고 현주는 일어설 차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