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山水畵와 나」
山水畵를 시작한지 어언 20년이 지났다. 學窓時節의 初期에 서투른 樹石法과 준法 같은 것을 마구 휘두르고 構成設彩를 함부로 구사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年이란 年輪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빠르고 허무한 것은 세월인가 한다.
사람들의 나이 40이면 不惑이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림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該當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山水의 심오한 멋을 깨달을 수 없고 마음내키는대로 神通한 技術을 다부릴수 없으니 막막하다. 나의 山水畵도 不惑의 妙境에 도달하려면 적어도 40년이란 年輪은 쌓여야만 할 모양이다.
有名한 옛 畵家들은 畵格의 높고 낮음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매우 심각하게 다루어왔다. 그림의 格調를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앞서 作家의 호뢰불기한 氣魂이 양성되어야만 한다고 믿고 또 그림에는 반드시 作家의 精神이 그대로 反映되는 것이라 믿었기에 뜻있는 作家들은 機會만 있으면 山間벽지를 전전하면서 道觀의 文을 두드리고 山水좋은 곳에서는 몇해를 살면서 思想의 깊이를 더하고 風流한 멋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過去의 力作으로 알려지는 여러 山水畵 가운데에는 形似以外의 멋을 지닌 어떤 超然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때때로 그들 作家의 自然觀이 전혀 색다르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自然 그대로의 形象을 묘사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품고 잇는 다른 흉억의 世界를 同時에 나타냄으로써 보다 次元이 높은 境地를 畵面에 結構하는 것이다.
이 흉억의 世界觀은 結局 自然의 涉獵 또는 행각의 많은 經驗으로부터 얻어진 貴重한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며 우리들이 따를 수 없는 心眼의 高次的인 世界를 開拓하는 武器인 것이다.
自然 그래도의 形象을 그리다 보면 자칫 그림이 俗化될 憂慮가 있다. 作家의 主觀的인 自然과 孤高한 人間像이 함께 그림으로 나타날때 그 그림은 氣운이 生動하게 된다. 山水畵가 一般的인 風景畵와 格式을 달리하는 것은 이러한 思想의 背景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山水畵를 좋아하고 또 그것을 그리게된 動機는 모름지기 이러한 매력에 誘惑을 느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機會만 있으면 그들의 自適하는 生活을 본받으려고 무진히 애를 써본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마음뿐이요 理想일뿐이지 實薦에 옳김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우리 周邊에는 到處에 錦繡같은 아름다운 山水가 있으며 제 아무리 멀다해도 단 몇시간이면 달려갈 수도 있건만 그것이 뜻대로 안된다. 몸은 都心地에 있고 마음은 山水의 鄕愁를 달래고 있으니 矛盾 가운데서도 나는 내 나름으로 꾸준히 山水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어느 程度 成功作이라 할만한 作品이 되어나올때면 적지않은 自慰와 희열을 느껴본다. 아직 四十不惑의 自信滿滿한 山水畵는 아니라 할지라도 남은 20年後의 不惑의 世界를 克服하기 위해서 꾸준히 줄달음을 처봐야 하겠다.
朴世元(서울大 美大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