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성월에 예술인의 입장에서 순교자들을 묵상해보라는 주문을 받고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으나 순교자들에게 향한 일반적인 경외감(敬畏感)이나 장열감(壯烈感) 외엔 특별한 감상이 솟지 않고 또 우리한국의 순교자나 전세계 가톨릭교회 역대치명자들의 예술과의 관련에 대하여도 아는 바가 없어 두루 사색의 나래를 펴가는 중, 전후 일본서 다자이·오사무(太寄治 1909년~48년)라는 소설가가 『굳바이』라는 장편을 신문연재 하다가 그 인기의 절정에서 기생과 정사를 한 「센세이셔널」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일본의 제일급의 평론가 가메이·가쯔이찌로(亀井勝一郎)가 이자살을 「그리스도의 모습(基督像)」이라는 이색적인 표제를 내걸어 찬미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즉 그의 논지(論旨)는 한 예술가가 자기의 작품 속에서 제시한 미(美)나 정신적 입상(立像)을 스스로 체현(體現)하려드는 것은 진정한 작가적 진실에 비롯된 것으로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인류구속이라는 그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과 한가지라는 얘기였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 저해바라기의 화가 빈센트·반·고호가 자기의 자화상을 그려 친구에게 보였더니 그 친구가 귀가 『닮지 않았다』니까 헤어지고 돌아와서 자기 귀를 잘라 싸서 보낸 사실이라든가 그가 밀밭에서 자살하고 난 유서에
『이제 나는 그림에 대하여 목숨을 걸었고 나의 이성은 그 때문에 부서져 버렸다』고 한 대목 등에서 죽음이 예술에 대한 치명임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술적 치명사건은 현대한국에도 있었고 나는 가장 가까이서 겪은 사람의 하나로서 세계적인 천재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년~56년 그의 담배銀紙에 부각한 그림 등 3점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나의 향우(鄕友)로서 여기다 그의 예술이나 인간을 소개치 못하는게 유감이지만 세상에서 그를 미쳐 죽었다고도 하고, 굶어 죽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고도 하나 그의 삶과 죽엄이 다함께 오로지 그림이었음을 나는 보아왔고 또 때마다 이를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면 저들의 죽음이 비록 자해(自害)행위이나 단순한 일반적 자살과는 달리 자기가 추앙하는 미(美)라든가 자기가 창조한 입상(立像)이라든가를 완성하기 위한 자기 생명의 희생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좀 망념된 언사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이나 순교자들의 치명행위도 죽음을 자각하고 자초한 일종의 자결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다함께 자기 생명을 말살한다기 보다 자기를 더 높고 기리는 차원에다 자기를 올려놓음으로써 자기를 완성하려는 행위라 하겠으며 이것은 또한 본질적으로 하나의 창조행위인 것이다.
물론 엄격히 따질 때 종교적 치명행위와 예술가의 치명행위 속에는 본질적인 차이와 그 가치의 차가 비교도 안되는 것이며 더우기 일반이나 예술가라해도 염세자살과 같은 것을 이와 혼동해서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된다. 오직 신앙의 순교자와 진정한 예술가들이 죽음을 놓고 『자기 존재를 자기생명이상으로 여기는』 그 동질성(同質性)만을 이 기회에 살펴본 것뿐이다.
끝으로 우리는 가브리엘·마르셀의 말대로 저 순교자들처럼 『죽음을 자유로운 행위』로 할 수 있는 공부를 이달에 해야 하겠다. 이것은 지금 순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죽음의 영접에 있어 그야말로 자살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희생의 입장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죄에의 타락이야말로 목숨이 붙어 있다손, 자살중의 자살, 영원한 자살인 것이다.
具常(詩人·本社論說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