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救世史(구세사) 교실] ⑫ 聖祖史記(성조사기) ② 歷史的(역사적) 背景(배경)
流浪(유랑)의 被支配者(피지배자) 民族(민족)
聖祖(성조) 아브라함 通(통)해 가난안땅으로 引導(인도)
발행일1969-05-18 [제669호, 2면]
『나의 조상은 방랑하던 「아담」 사람이었삽더니 에집트로 내려가 몇사람으로써 거기서 나그네살이 하다가, 크고 세고 수많은 겨레로 이뤄졌나이다』(신명 26·5).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년 맏물 봉헌 축일에 「약속의 땅」에서 난 「모든 토산물의 맏물」을 따서 성전에 가지고 가 봉헌할 때 외우던 「신앙고백」의 첫 구절이었다. 기원전 19세기 중엽 유목민 아람족의 한 가족이 유프라테스강 上流지방에서 「가나안」땅으로 이주해왔다. 그 族長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요 우리 「신앙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다.
요수에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이스라엘의 천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너희 조상들이, 아브라함의 아버지요 낙호르의 아버지인 테락흐 하며, 예전부터 저 강 건너편에 머물러 다른 신들을 섬겼느니라.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저 강 건너편에서 데려다가 그에게 「가나안」의 온땅을 거닐게 하고 그의 후손을 많게하며 그에게 이사악을 태워주었노라」…』(24·2).
따라서 성경이 보고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방랑생활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먼저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의 문화, 즉 아브라함이 「하느님 앞에서 거닐기 위해」 流浪의 길에 오르며 결별했던 생활환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찍부터 「수메르」인은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兩河의 下流地帶에서 文明의 꽃을 피웠다)기원전 3천년경).
그래서 페르샤灣의 연안을 「수메르」라 하고 內陸지방을 「아카드」라고 부르나 地理的으로 인접해 있을뿐 아니라 같은 文化圈에 속하기 때문에 보통 메소포타미아 지방이라 통칭된다. 이른바 「비옥한 半月地帶」의 東部지역이다. 수메르인은 셈족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용모와 언어도 셈족과는 달랐다. 수메르인은 평화로운 농업민족으로서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 PATESI라 불린 小王에 의해 통치된 도시국가(공동체)들을 이루고 살았다.
이와는 달리 아카드지방에는 기원전 23세기경 「사르곤」이라는 셈족출신의 강력한 통치자가 나타나 勇名을 떨치었다. 오래지 않아 수메르 지방은 아카드인들에게 정복되었다. 그러나 「구데아」왕이 다스린 「라가쉬」에서 곧 새로운 수메르문화가 부활하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시대 이전부터 아카드와 쉐르의 도시들은 高度의 土着文化를 꽃피워 왔었다. 유목민들도 이 古代문명 도시들을 찾아 천막을 쳤다. 「아모르」족이 그랬고, 이어 「아람」족이 그 뒤를 따랐다. (오늘날에도 베두인족은 트란스 요르단의 여러 도시 於口에 그들의 천막을 치고 있다.) 이 아람족 가운데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20세기초엽 수메르의 한 도시 「우르」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는 당시 독립을 잃고 처음에는 「이신」과 「라르사」의 小王들의 지배를 받다가 후에는 아모르족의 바빌로니아왕들의 통치를 받게되었다.
이 바빌로니아 第一王朝에서 가장 유명한 왕이 저 함무라비왕이다.(BC 1729~1686)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 一家가 「우르」를 떠나게 된 것은 이 바빌로니아 王朝의 執權 즉 통치자의 교체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考古學의 발굴작업에서 발견된 어떤 碑文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신무발릿王(함무라비왕)의 先任王들중의 한사람) 14년에 「우르」에서 大虐殺이 있었느니라』 말하자면 문명도시 「우르」에는 혁명(政變)의 퐁풍이 휘몰아쳤던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피난의 길에 올랐다.
그 피난민 속에 아브라함 一族도 섞여있었을까?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중의 일부가 유프라테스강 上流(西北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이라는 도시에 정착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때 「우르」지방의 雜神 즉 月神과 그의 짝(配偶)인 「닌갈」女神도 가지고 가서 섬겼을 것이다. 아브라함 一族은 오래전부터 바빌로니아의 이 작은 家庭守護神들을 섬기는 신앙에 젖어왔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 그들에게는 모든 「아람」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뿌리박고 있는 유목생활에의 鄕愁도 있었다. 그것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이었다.
聖祖 아르바라함은 「우르」와 같은 문명도시 「하란」에도 정착해서는 안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나안」땅을 향해 떠났다. 지금까지 그를 「바빌론」에 얽매어온 모든 속박을 끊어버리고 유목민으로서의 옛 방랑생활로 되돌아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록 화려하게 발달은 하였으나 하느님과 일치된 생활을 하는데는 위험스러운 異敎的 土着文化와 결별하고 표연히 「나그렛길」에 올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