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救援(구원)의 媒介者(매개자)
하느님의 계시헌장 제2항에 『人間은 혈육을 취하신 말씀,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신 안에서 성부께로 가까이 나아가고 천주성에 참여하게 되었다』하는 에페소서 2·18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톨릭교인의 전체생활을 명백히 드러내는 말이다. 인간이 천주성에 참여하기 위해선 성부께로 나아가야하는데 그 세계는 영신세계이며 그 길은 그리스도, 천주 제2위 성자이시라는 것이다. 人間의 구원은 성부를 알아 공경하며 사랑하는데 성신으로 할 것이고 그리스도를 필수적인 매개자로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성부와의 대화는 육신의 입이 아닌 영신의 입으로써 그리스도의 言語를 빌려 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人間편으로 볼 땐 순위가 첫째 그리스도를 알아야하고 둘째 성신의 권내(圈內)에서 성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 성부를 성신으로 인해 알고 사랑하려면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이뤄지며 그리스도를 모르면 성부도 성신도 모르게 된다. 따라서 성부를 알려면 그리스도를 알아야하고 그리스도를 보는 자 성부도 보는 것이다.(요한 8·19) 따라서 우리의 종교생활은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하겠다.
■ 그리스도는 누구?
지난여름 방학 때 백여명의 가톨릭학생회 회원과 더불어 하기수련대회를 가졌을 때의 이야기다. 당시 이 대회에선 여러 가지 행사를통해 종교교육 인간교육을 실시하고 상호친목을 도모했는데 그중 다음과 같은 「앙케트」를 내어 학생들의 해답을 모았다.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어떠한 존재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해야할 학생들은 모두가 대학생이었고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가톨릭신자였으며 대부분은 태중영세 받은지 이미 오래 되었고 가톨릭학생운동에 제일 앞장섰다고 자칭하는 학생들이었다.
설문의 성질로 보아서는 학생들에게 어떤 추상적인 개념을 밝히라고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각자간의 상호친밀관계를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제 그 답을 한 번 살펴보자. 그중 대다수의 학생들이 『잘모르겠다』고 했다. 몇몇 학생들은 『그리스도는 神이 아니다』하였고 또 몇몇은 『우리 구원에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하였다. 그중 한 학생은 자기 책상위에 그리스도께서 가시관을 쓰신 상본을 두었는데 이유인 즉 人間으로서 그와 같은 고통을 감수하셨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어떤 여학생은 『그리스도는 마치 오빠와 같은 존재로서 마음 놓고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다』고 했다. 필자는 이러한 답을 받고 대단히 놀랐다. 물론 여기에 각 답의 「퍼센티지」나 이 「앙케에트」 전체의 분위기, 또 학생들의 그때 심리상태 같은 것을 밝힐 필요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답들이 가져다주는 문제점이고 또 반성해야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 教育方法의 反省
여기에서 우리는 왜 이러한 답이 나왔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원인은 많을 것이나 두가지만 들어 보자.
첫째는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실시해 온 교리교수법일 것이다. 나이와 학벌의 차이를 불문하고 무조건 문답 320조목을 암송케하는 교수법은 지양해야할 것이고 또 철학적인 체계에 의한 교리설명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제시하는 복음전파가 필요하다고 본다. 성경은 따라서 교리교수의 첫 교본이 되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교리와 일상생활 간에 밀접한 연관성을 밝혀야할 것이며 교리를 지식으로만 전달할 것이 아니라 생활하도록 가르쳐야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형성된 人間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 敎會像, 그리스도
둘째로 교회문제가 있다. 그리스도는 사실 인간에게 아주 매력적인 존재이다. 교회는 그의 지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젊은이들에게 아무런 매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왠일일까? 그뿐 아니라 젊은이들은 교회에 나오길 싫어하거나가 가톨릭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교회의 성원들은 누구보다 앞서 사랑을 실천해야할 텐데 완고하고 몰이해하며 비인도적인 일을 저지르고 있다. 이해성없는 신자나 성직자나 수도자는 人間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時代의 흐름에 따라 변하여 가는데 교회는 불변의 진리만을 부르짖고 쇄신하기를 거부한다면 젊은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갈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 가톨릭敎가 도입된지 이미 2백년, 과연 우리민족의 그리스도化는 올바르게 되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천주를 믿는 천주교인이 되었지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를 사랑하고 믿는 가톨릭교인이 되지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공의회정신에 입각한 쇄신이고 교회일치운동이고 전례운동이고 평신도 사도직등 모두가 허사이기 쉽다. 먼저 그리스도化가 급선무일 것이다. 물론 전자와 후자사이에 전혀 관계가 없지 않다는 것을 필자도 인식하고 있다.
■ 結論 → 聖經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한국교회는 전력을 다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되찾아야 하겠다. 이것은 성경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성경은 하느님의 업적과 그의 말씀 즉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하였으니 그리스도의 모습·습관·생각·교훈·원하시는 바는 여기에서 밖에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선물이니 만큼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찾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교리를 가르치고 세를 주는데 교리에 앞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할 것이며 이때 그리스도를 추상화하거나 개염화 하지 말고 그의 생애를 그대로 전해주어야 할 것이다. 베드로 사도께서 성신을 받으시고 「예루살렘」에 모인 유데아인들에게 처음으로 강론하실때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主시요. 그리스도시라는 것밖에 말씀하시지 아니하셨던 것이다.(사도행전 2·17~36)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어 바로 그리스도의 생활을 하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복음전파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성원인 우리는 반드시 반성해 보아야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에게는 어떠한 존재인지 알아보자. 주일미사나 기도때만 불러보는 이름인지 나의 생활 속에서 나와 함께 동고동락하시는 분으로 모시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이름은 나에게 수치감을 주는지, 나의 영광이 되는지? 나는 어려울 때만 그를 찾는지 나의 생활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지? 성경의 말씀은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는지? 이 모든 질문에 우리는 양심적으로 대답해 보아야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교회의 참된 쇄신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金慶桓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