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藝時評(문예시평)] 信仰(신앙)의 詩的(시적) 方法(방법)
「原罪(원죄)」解釋(해석), 文學的(문학적) 直觀(직관) 必要(필요)
散文的(산문적)인 解釋(해석), 스토리의 寫實化(사실화)로…映畵(영화)「天地創造(천지창조)」…
舊約聖書(구약성서)의 詩的(시적)「이미지」깨뜨려
신심(心)을 「테마」로 한 어느 소설이 있을까. 아무리 찾아봐도 요몇달새엔 그러한 소설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던 중 「천지창조(天地創造)」라는 영화를 하나 보았다. 「바이블(BIBLE IN THE BEGINING)」이라고 되어있어 구약성서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까 열심히 보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나에게 감명을 주지 못했다.
오경웅(吳經熊) 박사가 한말가운데에서 『대체로 동양은 여성적인면이 강하고 서양은 남성적인면이 강하다』고 했으며 동양인은 차(茶)를 사랑하고 서양인은 커피를 좋아하는데 포위스 같은 서양사람은 차를 좋아하면서도 커피를 댓잔들이키고 난 사람처럼, 조용한 예지를 오히려 소란한 방법으로 설교하러든다』고 하였다.
과연 나는 그「바이불」이란 영화를 보고서 성경의 원뜻보다도 이 영화를 만든 서양인의 체취를 더 강열하게 느꼈다. 아브라함이 겪는 피튀는 전쟁, 「소돔」 「고모라」의 도성(都城)이 당하는 불의 형벌, 이보다 앞서 있었던 노아의 배이야기 등 에덴동산의 선악과(善惡果)에서 시작하여 끝없이 출현하는 모순과 갈등과 싸움의 소란으로 영화가 꾸며졌다.
특히 물로써 세상이 망하는 홍수 때에 노아가 하느님의 명에 의해 지상의 모든 생물 중에서 암수 한쌍씩을 데려다 배안에 함께 태우는 장면묘사에서는 우직한 무리를 드러내 흥미 본위의 아동영화 같은 수준을 보여준다.
이 사실을 보고서 나는 종교의 세계 특히 창세기(創世紀)를 산문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흙으로 빚어진 아담, 그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만들어지는 에와에 대한 묘사부분도 현대과학세계의 인간들에게 너무도 납득력이 약하다. 모든 생물의 진화과정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오늘에 있어서 아담과 에와의 그 탄생기는 허황하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선악과(善惡果)의 문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과연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이어야 하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끔찍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영화 「천지창조」는 그 전제된 원죄(原罪)의 피비린내 나는 악순환으로써 끔찍한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이 경우 세속 나름의 문학예술적 직관에만 의거해 생각해보더라도 원죄에 대한 풀이를 그렇게 살벌한 내용으로 전개하고 싶지 않다는 정서적 충동을 느끼게 된다.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성선설(性善說)까지 있어왔거니와 모든 인간의 천품에서 선의인자(因子)를 발견할 수 없다면 구림(救靈)의 사업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의문에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 나의 소박한 정서적 충동이다.
사실상 불완전하고 죄 많은 우리의 인간적 실재를 그냥 죄로 인정하면서 모든 인간 속에 숨은선의 인자를 하느님의 사랑의 구속으로 이해해 나아가야 한다고 하면 오히려 무리없이 그 섭리에 복속되고 싶은 것이 현대인의 이성일 것이다.
최근엔 유럽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원죄는 어떤 형태의 죄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거나 배척하기에 앞서 빠져있는 선천적(先天的)인 무관심의 상태』라고 주장되고 있다고 한다.
적어도 내 나름으로는 분명히 빠져드는 이 섬세한 납득의 문제를 앞에 놓고 나는 차라리 다음과 같은 한귀절의 시에 매혹된다.
나는 기도실을 뛰쳐나갔다.
어디서 밀려오는 어둠일까
아 저녁의 은혜, 화평,
먹칠하듯 어둠이 휘몰아 오는 누리에
이 저녁의 숲은 비경(秘境)이구나
나는 구석구석마다 뛰어 갔네
거기 많은 사물을 익혀 두고
마지막 현상(現象) 앞에
정지(靜止)한 빛이
위대한 신앙의 표적으로 박제되는 모습을…
<朴利道 新刊詩集「回想의 숲」속의 「세례以後」>에서
이것은 한인간의 청순하고 열기있는 영혼이 절대자의 존재를 감독한 기쁨을 노래한 시다. 저녁의 어둠속으로 통일되는 우주의 공간 속, 한 인간의 발이 미치는 곳은 모두 신비롭다. 그렇게 화평스럽고 은혜로운 세계 속에서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이 신앙의 징표로 창조되는 기쁨을 신앙은 지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의 기능이야말로 신앙의 문제를 소화하는 이상적인 방법이 아닐까 구약성서도 시적인분위기로 씌여져 있기는 하지만 산문적 스토리로 남는 신화적 구체성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는 깨어지고 마는 것 같다. 신앙의 일체방법을 시로서 보다 원만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하게 된다.
具仲書(文學評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