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40) 분수령 ⑥
발행일1969-10-05 [제688호, 4면]
거처가 안정되기는 했으나 용신이는 어쩐지 다리 밑에 있을 때 보다 패기가 줄어들고 있다고 현주는 보았다.
종일 멍청하니 방안에서 뒹굴고 있는가하면 낮잠이나 자고 그렇지 않으면 연거퍼 담배를 피기만 하는 등 탈기한 사람같게만 보였다.
조용한 분위기임에도 한번도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을 볼 수 없었다.
다리 밑에서는 다리밑 주민들을 상대로 곧잘 켜곤했다는 바이올린을 용신이는 현주네 집에 자리잡은 뒤에는 켜보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현주는 악보(樂譜)도 사다주었고 본래 갖고 있던 전축을 용신이의 방에 옮겨 놓고 레코오드판, 그것도 바이올린 곡을 곧 사다주기로 했다.
그래도 용신이는 별로 그걸 걸어 놓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듯했다.
(왜 그럴까?)
현주로서는 까닭을 알 수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 쏘다니는 일도 없었다.
현주는 그러는 용신이에게 신경이 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연한 것을 했었나?)
스스로 후회도 해보았으나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용신이를 바른 길로 이끌어 음악가로 대성시켜 주겠다는 사명감을 다짐한 현주였으므로 이내 자신을 나무랬다.
『이젠 피곤도 풀렸을 테니 공부를 시작해볼까?』
하루는 세수를 하지 않고 담배만 피우고 있는 용신이를 보고 말했다.
『공부요?』
『고 선생에게 말했어요. 만나보자고 했으니 언제 한번 가볼까?』
『고 선생』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다. 용신이는 되뇌이고 머리를 수그리더니
『전 역시 다리 밑이 좋은것 같애요』
우물우물 말했다.
『뭐라구요?』
현주는 발끈 화가 치밀었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여 건전한 걸로 인도하고 음악가로 대성시켜주려는 성의를 몰라준다는 생각에서였다.
『처음에는 선생님 옆에 오면 마음이 편하고 앞이 훤할것 같았어요. 그러나 이렇게 하는 일없이 선생님의 폐만 끼치는 것이 사나이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
『이렇게 하는 일없이 얻어먹는 것도 떳떳치 못한데 레슨까지…』
현주는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옳지. 이를테면 거저 얻어먹거나 레슨비용을 받는게 남자로서는 못할 일이라는 뜻 알겠어요』
현주는 웃으면서 말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옳은 말이야. 그럼 용신이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해주면 될거 아니겠어?』
『어떻게요?』
『내 조수로 임명하는 거야?』
『선생님의 조수?』
『그렇지』
『건축설계사의 조수?』
『별로 힘들게 없어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니까』
『글쎄요』
『보수는 넉넉히 줄터이니까』
『적당한 보수라야지… 덮어놓고…』
『물론 기본보수야 대학 알바이트 정도로 정하지마는 보너스가 있는거요. 큰 설계에는 설계료도 많이 들어오니까?』
용신이 잠자코 있더니 물었다.
『그건 그렇더라도…』
『아버지의 양해?』
『그까짓 건 아무관계 없어요』
『왜 관계없어…』
용신이 무어라고 더 말할려는 걸 현주가 막고
『어떻든 그것도 쉬 해결 될거야. Y 선생이 극력 절충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역시 용신이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현주는
『자 가자구 첫월급을 선불해줄 테니 우선 양복 한벌 맞추라. C 선생도 만나 뵙겠는데 그 옷입구야 위신 문제 아니야?』
익살스럽게 말했다.
『양복요?』
『위신상, 관계상, 문제라니까.』
『뭐 그런 외면 치례 같은거 전 무관심이요』
『용신이는 그렇지만 내 위신에 금이 간다는 거야. 그 선생이 뭐라겠어?』
『선생님의 체면이?』
『여러 말 말고 가자구…』
『월급, 몽땅 양복해 입으면 나중에 어떻게 하려구요. 레슨비 같은거…』
『그럼 월부로 맞추면 되지않아?』
용신이는 생각에 잠기더니
『싼걸로 하기로 한다면…』
그리고 부시시 일어났다.
『먼저 세수를 하고』
『세수? 어제 철저히 했으니까, 오늘 괜찮을 건데…』
『뭐? 어제 했으니까?』
현주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용신이도 웃으면서
『선생님과 동행인데 선생님 체면상 관계상 세수하지요.』
그리고 세면실로 들어갔다.
면도까지 하고 나오는 용신이는 참으로 멀쑥한 청년이었다.
현주는 와락 용신이를 껴안고 뺨에 뺨을 부벼주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래?)
현주는 마음을 도사려 잡고 용신이를 데리고 낙원동으로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탄 양복점을 찾아갔다.
그 금메달리스트의 손으로 지은양복을 용신이에게 입히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마침, 그 사람이 있었고 용신이도 솔깃이 몸을 재도록 맡겨 두었다.
『잘 해주어요.』
나올 때 현주는 현주답지 않게 양복점원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