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動神學(반동신학) 異見(이견)] 한스 큉 反動(반동) 아니다
權威(권위)의 새 모습 探究(탐구)
너무 서두른 것이 루터의 過誤(과오)
忍耐(인내)로 對話(대화) 通(통)해 主張貫徹(주장관철)해야
인간의 지성은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현재 세계의 신학자들은 각기 자기주장을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게 발표한다. 그러나 훌륭한 신학자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저 자기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주장뿐이다. 그들의 생각을 올바로 알아듣기에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남의 主張을 성급하게 判斷하면 잘못되는 수가 많다.
일찍부터 『아리오는 아리안이 아니다』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아리아니즘은 아리오의 본 생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나는 이제 『루터도 루테란이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의 적극적인 요망은 그의 부정적인 태도에 덮여 버려 바른 이해를 받지 못하였었기 때문이다. 한스 큉 신부가 말하였듯이 루터의 주장이 「뜨리덴띠노」 공의회에서 단죄 받은 것은 루터가 「너무 서둘렀던」 탓이다. 그가 만일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다른 신학자들의 이해를 기다리며 교회 안에서 끝까지 인내로이 주장하였더라면 「義化 문제」 「교권문제」 「성사문제」 등을 다룬 「뜨리덴띠노」 공의회의 전문 위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항차 요지음 가톨릭 신학자들이 자기주장을 발표한다고 해서 보수파니, 진보파니, 심지어는 반동파니 하는 낙인을 찍을 필요가 어디 있으랴 싶다. 새로운 학설을 발표하는 신학자이건 전통적 학설을 고수하는 신학자이건 교회를 위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꼭 같은 것이다. 진정 깊이를 가진 신학자라면 서로의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대화를 막아버리는 사람은 바로 「서두르는」 사람들이다. 자기주장을 남이 이해해주는 것만으로 만족치 못하고 자기주장으로 남의 주장을 꺾어버리려는 성급한 사람들이 두통거리인 것이다. 또 솔직히 말해서 새로운 것을 신속히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매스 메디아」 종사자들이 성급하게 보도함으로써 본인들의 뜻까지 거슬러 물의를 일으키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흔히들 쉬넨스 추기경을 신진파라고 보도하고 마치 교황제도에도 전하는 인물인 것처럼 보도하지만 그의 심경은 그런 것이 아님을 그의 저서에서 명백히 발견할 수 있다.
또 한스 큉 신부의 회견기를 대문짝 같은 「反動神學?」이란 제하에 보도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서는 아무런 반동요소도 발견할 수 없음을 오히려 섭섭하게 생각할 정도이다. 그의 말 어느 귀절 때문에 「反動神學?」이란 제목이 붙여졌는지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다. 그의 친구들이 주교 대의원회와 같은 시기에 같은 「로마」에서 회합을 가지는 것도 주교 대의원회에 참석하는 주교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직접 전달해보려는 선의의 자발적 자문의 역할로 보아주면 얼마나 다행하랴 싶다. 꼭 「反시노드」란 딱지를 붙여야할 이유가 어디 있으랴? 남들은 그를 反動이라고 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권위에 반대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이 말은 「反動神學?」이란 제목과 얼마나 대조적이냐? 그는 또 교황 수위권에 대해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도 명예 수위권의 의미에서뿐 아니라, 덧붙여서 율법의 수위권, 사목적 수위권, …우주적 교회의 상징이며 후원자라는 의미에서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기자회견에서 밝히고 있다. 한스 큉 신부가 프로테스탄트 보다 더 심하게 교황 수위권을 과소평가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오늘날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은 무류권의 성서적 역사적 근거와는 관계없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표현자체가 퍽으나 객관적이고 온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가톨릭의 주장을 전폭적으로는 수긍하지 못하지만 여러 면에서 교황 수위권을 인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한스 큉 신부는 그의 말대로 교황권이나 아무런 권위에도 반항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내의 일치와 질서를 위해서 권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권위는 강압적이 아니고 사제직과 도움의 권위이며 복음의 권위라야 한다』고 소신을 밝힌다. 권위를 어떻게 설명하면 보다 많은 사람이 환영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 의 관심사인 것이다. 이런 사람을 왜 反動이라고 부르느냐 말이다. 권위는 교황권위뿐 아니라 주교의 권위, 본당신부의 권위, 스승의 권위, 가장의 권위, 다 같은 성질의 권위일 것이다. 이런 모든 권위가 강압적인 권위가 아니고 좀 더 이해와 협동과 사랑에 바탕을 둔 권위라야 하겠다는 것이 한스 큉의 요구일 뿐 아니라 현대인의 공통된 요구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모든 권위를 무시하고 반항을 일삼는 난동분자들이 참反動이지 권위의 새모습을 탐구하는 신학자들이 반동인 것은 아니다.
권위가 인정되면 순종이 따라야 한다. 억압적 권위가 배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맹목적인 순종도 배격되어야 한다. 일치와 질서를 위해서 자발적 순종도 필요한 것이다. 공동선을 외면하는 악의의 권위라면 몰라도, 일치와 질서라는 공동선을 도모하는 선의의 권위라면 비록 그릇된 판단에 기인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선은 일치와 질서를 위해서 순종하면서 기탄없는 대화를 인내로이 계속함으로써 그릇된 판단을 시정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 이든 반항은 과격하기 일쑤이다. 우리네 주위에서 권위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가끔 자신들이 비난하는 그 권위 이상의 포악한 권위를 자신이 행사해 보려는 족속들이다. 말 많은 현대 사조가 어떠니, 한스 큉의 사상이 어떠니 하지만 교황이나 주교의 권위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권위를 차지해 보겠다는 속셈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주교까지를 포함한 동료들 위에 자신의 주장을 군림시켜 보려는 야심의 발로인 것이다. 요컨대 현재의 권위를 인정하고 새로운 모습의 권위와 새로운 자세의 순종을 모색하는 인내를 기르며 너무 「서둘지」말아야 하겠다. 한스 큉 신부의 학설을 반동이라 부르기 전에 그의 학설을 깊이 연구하고 그의 핵심사상을 발견한다면 교회쇄신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金南洙 神父(신학박사·CCK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