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로사리오성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가장 原初的이고도 가장 성숙한 人間歸鄕이라한다면 흔히 現代人을 가리켜 고향 잃은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는가? 신자들마저 로사리오의 겸허한 염원을 잊어가는 이즘, 한 신부의 성모의 轉求로 인한 굳은 意志에의 도달을 여기 소개한다. 【편집자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어려웠던 일은 성공회 신부직을 떠나 가톨릭신부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영세를 받은 성공회 성당을 끔찍히 사랑했다.(지금도 그렇지만)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성공회 신부였었다.
나는 그 사실에 지금도 감사한다. 왜냐하면 10년 후 가톨릭에의 개종을 결심하기에 이르게 한 가톨릭의 진리를 대부분 그들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개종을 결심하기에 이르렀을 때는 아직 제2차 「바티깐」 공의회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그때의 가톨릭을 외적으로 보면 사람을 끌기는커녕 도망을 가게 할 정도였다. 교리적인 문제 중에도 나는 해결하지 못한 의문점이 있었다.
일단 개종을 결심하고도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들 흔히 말한다.
그러나 부족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참다운 의무와 진리를 깨달을 빛이다.
교리상의 미묘한 문제 외에도 나는 양심의 문제로 괴로워해야 했다. 내가 성공회 신부로 서품받을 때 성공회의 교리를 옹호하겠다고 서약했던 것이다.
그리고 본당신부로서 신자들의 사목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로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내가 가톨릭으로 개종할 경우 그 순간부터 나는 신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언제 다시 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 가톨릭신학교는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막기 위해 온갖 규칙이 엄하며 작은 규칙하나를 어겨도 즉시 쫓겨난다고 들었다.
그래서 10여년이나 자유로운 인간으로 또 본당신부로 생활하다가 그런 생활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겁도 났다.
나는 개종하여 가톨릭신부가 된 옛날의 나의 고해 신부를 찾아가 상의했더니 그는 『결코 신부가 될 때까지 못견딜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22살 때부터 신부가 되기를 원했는데 지금까지 다른 성소는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나는 성공회에서 신부였고 그 신부직을 사랑했으며 값진 진주로 여겼다. 나는 내가 사제라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가톨릭에서 나의 성공회에서의 신품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나의 개종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유태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트라피스트의 수사 한분이 마지막 단계에서 나를 도와주었다. 우리의 토론은 언제나 『다시 사제가 될 수 있다는 보장없이 어떻게 사제직을 포기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되돌아 오곤했는데 어느날 그 수사는 하나의 제안을 했다. 『언젠가는 당신의 사제직을 되돌려 달라고 하고 지금은 그 사제직을 성모님께 맡기는 것이 어떻습니까?』라고.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무릎 꿇고 이러한 지향으로 성모경을 3번 염했다.
개종한 다음의 수년간은 모든 면으로 어려운 시기었다. 개종한 신부의 말도 사실인 것 같이 보였다.
가톨릭 신학교에 다닌지 18개월이 되었을 때 학장은 나에게 서품에 추천할 수 없노라고 말했다. 나는 할 수없이 신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것은 사제가 되는 마지막 길인 듯했고 나를 아는 신부들도 평신자로 만족하라고 했다. 트라피스트 수사까지도 이 견해에 기울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내사제직을 성모님께 맡긴 것을 잊어버릴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암담해 보이는 순간에도 나는 성모님이 언젠가는 그 사제직을 내게 돌려주시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 후 가톨릭학교에서 수년간 평신자교사로 일하다가 또 한번의 기회를 얻었다. 내가 교사로 있던 교구의 주교가 그 교구 신학교에 나를 받아준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현실은 허구보다 더 기구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첫 신학교에서는 3학기를 견뎠는데 여기서는 불과 석달도 채우지 못했으니!
여름방학이라 보따리를 싸고 있는데 학장이 다른 신부를 통해 『돌아오는 수고는 안해도 좋다.』고 말했다.
다시 2년이 흘렀다. 나는 신학박사 학위과정을 밟고 있었다. 사제가 될 수 없으면 최소한 신학이라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목적도 있었다.
즉 내 마음이 아직도 신학과 사제직에 있다는 것을 교구주교에게 보여 마침내는 신학교학장의 의견을 교구주교가 취소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도 성모님이 내 사제직을 보관하고 계신다는걸 잊지 않았다.
내가 트라피스트 수사와 함께 성모송을 염하기 위해 꿇어앉아 기도한지 8년 후에 나는 가톨릭 주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친구신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교의 개인 경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것이다.
95분 동안의 식이 끝나자 주교님은 내게로 얼굴을 돌리고 다정하게 『헉스 신부님 우리는 당신을 우리교구성직자로 환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제단을 향해 「살베레지나」를 불렀다. 나는 성모님께 대한 나의 신뢰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감사드렸다.
죤J·헉스 神父 手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