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會世界化(교회세계화)에 발돋움 첫 榮光(영광) 차지한 뷜로 卿(경)
新任(신임) 聖廳(성청) 國務長官(국무장관), 歐洲問題(구주문제) 專門家(전문가)
學識(학식) 聖德(성덕) 뛰어나고 外交手腕(외교수완)도 훌륭해
바티깐 第(제)2人者(인자), 두번째 非(비)이태리人(인)
불란서 靑年運動(청년운동)의 權威者(권위자)
「貧者(빈자)의 벗」 · 「敎會(교회)의 챔피온」
【로마 NC · RNS】 교황 바오로 6새는 86세의 고령인 암레또 치꼬냐니 추기경의 사의를 받아들이고 그 후임으로 불란서 「리용」 대교구의 교구장이었던 장 뷜로 추기경을 교황청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비 이태리인이 교황청의 제2의 자리에 앉기는 55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뷜로 추기경은 1905년 10월 불란서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생 아망 딸랑드」마을에서 검소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빠리」가톨릭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930년 4월에 서품되었다.
이어 「바티깐」 「성 토마스 아뀌나스」신학교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4년동안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유창한 이태리어는 이때에 습득한 것이다.
1934년부터 5년동안 「끌레르몽」 신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1939년부터는 「리용」의 가톨릭신학교에서 윤리신학을 강의하면서 가톨릭청년운동, 불란서 가톨릭 액션협의회 청년부의 지도신부로 활약했다. 1942년 동 신학교 부학장으로 임명된 후에도 계속 청년들의 지도신부로 일했다.
1950년부터 10년동안 불란서 주교회 사무국장직을 맡았으며 1954년에 주교로 서임되어 「빠리」대교구 보좌주교가 되었다.
1965년 1월 150만 인구가 살고있는 불란서 最古都 「리용」의 교구장이 되었고 2월에 바오로 교황으로부터 추기경 임명을 받고 1967년에 교황청의 성직자성성 장관이 되었다.
뷜로 추기경은 「교회의 챔피온」 또는 「貧者의 벗」이라는 칭호를 얻을만큼 겸손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쏟아왔으며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교황도 그를 임명하면서 『지혜롭고 탁월하며 교회의 참된 인물』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전임 치꼬냐니 추기경과는 달리 미국과는 별로 친숙하지 않으나 「유럽」문제에는 정통하며 외교솜씨도 놀랍다.
후리후리한 키에 안경을 끼고 활동적이며 진보적인 그는 주교회의 사무국장 시절에도 또 하나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 정부 · 교회관계가 미묘하게 뒤얽힌 문제들을 잘 다루었기 때문에 국제무대의 주역으로서도 손색없이 해낼 것으로 기대된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들끓고 성직자들은 버림받은 상태에서 살고있던 「리용」교구에서도 그는 노동자 복음화를 실천했었다.
그는 또한 학지아며 강의를 해본 경험도 많으므로 이 든든한 밑천을 배경삼아 세계도처에서 논쟁과 위기로 들끓고 있는 이 시대에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교황을 훌륭히 보좌할 것으로 보인다.
뷜로 추기경이 임명된 후 두 사람의 비이태리인이 교황청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이번에 새로 생긴 「신학위원회」 위원장인 유고슬라비아의 세퍼 추기경과 성직자성성 장관이 된 미국의 라이트 추기경이다.
이와같이 교황청 요직에 비이태리인을 자주 기용하게 된 것은 교황이 6년전에 약속했던 「교회의 세계화」를 이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결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