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42) 분수령 ⑧
발행일1969-10-19 [제690호, 4면]
양복을 맞추고 점심을 먹고 차값을 타가지고 친구를 찾아간 날 이후 용신이는 차츰 명랑성을 돌이키고 있었다.
전축을 트는 도수가 늘어나고 구석에 먼지를 쓰고 세워져있던 케이스를 열고 바요린을 꺼내 켜는 일도 있게 됐다. 현주는 잘하는 일이라거나 더욱 분발하라거나 격려와 칭찬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심이 없는체 팽개쳐 두었더니 하루 하루 용신이는 바요린 연습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양복을 찾아 입고는 외출도 가끔하곤 했다. 창백만 하던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바요린의 활을 움직이는 팔도 부드러우면서 힘차 있는 것 같았다.
현주는 대견해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용신이가 더욱 귀엽게 여겨졌다.
용신이는 현주에게 이젠 아무 간격도 두지않고 맏형수나 젊은 어머니 처럼 떼도 쓰고 응석도 부리고 했다.
『어때 이젠, C 선생한테 소개해줄까?』
그러던 어느날 현주는 용신이더러 말했다.
『C 선생?』
『바요리니스트 말이야』
그걸 몰라 그러나요?』
『그럼 왜 얼굴이 굳어져?』
『아직은…』
『아직은?』
현주는
『그냥 지금전공 그대로 하느냐? 음악으로 전환하느냐 그게 아직은 미결이라는 뜻으로?』
슬그머니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내 바요린 가지고 C 선생 같은 분에게…』
『옳지 부끄럽다는 얘기군』
『내 혼자 부끄러운 건 아무렇지 않으나…』
『그러니까 소개하는 사람 즉 나의 위신을 봐서 그렇다는 거군』
『선생님 위신상 관계상 좀 더 집에서 깽깽이질 하다가…』
『내 위신상 관계상은 걱정할 것 없구 우선 가서 테스트 해보자구.』
『테스트?』
용신이 되뇌이더니 시무룩해서
『테스트해서, 소질을 저울질해 보자는 건가요?』
현주를 보았다.
『그런게 아니라!』
『아니긴요. 테스트해서 대단치 않다고 판정이 내리면 날 버리자는 속셈이지 뭐예요.』
『어머머 억울해』
『그런 테스트라면 싫어요』
『어머머 얘가…』
현주는 용신이의 등을 주먹으로 꽝 지르고
『그 무슨 계집애 속알머리 같은 소리를 하구 있어 그러지 말구 가요』
내가 말하는 테스트라는 뜻은 그런게 아니야. 이제부터 레슨을 받겠는데, 그 예비단계로서 용신이 솜씨를 감정받자는 거야. 그것뿐이야.』
자애가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용신이는 풀리지 않고 이틀 동안이나 바요린을 케이스에 집어넣고 방에 틀어박혀 세수도 하지 않는 날을 보냈다.
(공연히 그런 말을 했군. 제가 스스로 C씨를 소개해 달랄때까지 기다릴걸…)
현주가 뉘우치고 있는데 이틀이 지난 뒤에 용신이는
『C 선생한테 데려다 줘요.』
부탁하는게 아니라 항의하는 것 같은 자세와 어조로 말했다.
『그럴까? 그러나…』
C씨에게 연락을 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아닌가?
『전화를 걸어 봐야겠어.』
전번의 실패 때문에 일부러 가라앉은 태도를 보인 것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현주는 C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C씨가 집에 있어 통화가 쉽게 됐다.
『예 전에 이야기 있던 학생?』
『알겠읍니다.』
『현주씨 부탁이라면…』
『아참 데리구오시오. 지금 한가한 편이니까…』
C씨는 현주를 학생시절에 아껴주던 음악가였다.
『지금 오래.』
현주는 용신이 있는 방으로 가서 말했다.
『지금 오라구요?』
용신이의 얼굴이 굳어졌으나
『가지요. 갑시다』
힘있게 말했다. C씨는 현주와 함께 용신이를 친절히 맞아 주었다.
차를 권하고 여러 가지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이야기 한뒤에 용신이 더러 바요린을 매만진 경력을 물었다. 용신이는 대강 대답했다.
『누구한테서 지도를 받은 일있나?』
『통 없읍니다.』
『없다?』
『예.』
『그럼 켜보여 줄까?』
그러나 C씨 앞이라서 그런지 용신이는 갑자기 주눅이 들고 말았다.
『오늘은…』
용신이 뒤통수를 극적극적하며 내키지 않아했다.
『오늘은 안된단 말인가? 안되면 안되는 대로… 오늘 밥은 먹었겠지?』
용신이는 더욱 궁지에 몰려드는 듯한 심정으로 청년답지 않게 수줍어하고 있었다.
『얘가, 수줍은 일면이 있어요.』
C씨의 기분을 할가봐 현주는 용신이를 위해 변명해 주었다. 그러나 무심코 「냬」라고 발음한 것에 현주는 스스로 움찔했다.
『수줍다니? 여기가 무댄가 청중 앞인가? 얼른 켜봐』
사뭇 명령조였다. 외면으로는 그렇게 부드럽고 감정이 풍부하게 보이는 C씨에게 어디 그런 위엄과 칼날 같은 것이 이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용신이는 두말도 못하고 가지고 갔던 케이스를 열고 바요린을 끄집어 줄을 고르고 했다.
『아무거나 평소에 즐겨켰던 짧은 걸 켜봐요. 단 유행가는 안돼』
용신이는 트로이·메라이를 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