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22) 갈림길 ⑥
발행일1969-05-25 [제670호, 4면]
이튿날 오전중 현주는 천천히 차비하고 영등포를 향해 버스를 탔다.
여러갈래의 감회가 현주의 가슴속에서 오가고했다. 박훈씨의 청혼, 최호진 군은 은근한 프로프즈… 거기에 외국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
그 세가지를 놓고 현주는 하나하나의 경우를 그끝까지 따져 생각해 보았다. 영등포까지는 먼길이요 시간이 걸리는 노정이다.
마침 자리가 생겨 앉기는 했으나 버스를 두번이나 바꿔타야 한다.
그 긴 거리를 심각한 문제를 놓고 파들어가면서 가는 것은 엄숙하고도 쾌적한 일이기도 했다.
너무 골돌하게 생각한 탓일까, 영등포 이모네집 근처의 버스정류장에 내렸을때에는 약간 머리속이 피곤한 느낌이었다.
피곤한 머리 속에서도 뚜렷이 남아있는 것은 Y 교수의 중매인 박훈시의 혼담과 자연스럽고 정상상태인 최호진의 접근과 그리고 이제 닥칠 양행(洋行)에 대한 - 그러니까 맨처름에 주제(主題)를 출발시켰던 그 출발점에 되돌아와 그 주제만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상태였다.
한가지도 해결의 실마리를 붙잡을 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주는 그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피곤한 머리속에 아지못할 안개가 기고 있는듯 했다. 그 안개! 현주가 젊고, 남달리 섬세하고 순결하고 겸손한 탓에 가져지는 것인지도 모를, 그윽하고 아름답고 어찌보면 찬란한 안개임에 틀림이 없다.
이모는 마침 집에 있었다. 현주네집에 비기면 비교도 되지 않을 이층 양옥! 정원도 굉장히 넓고 그 넓은 마당에 쭉잔디가 깔려있다. 벚꽃 고목이 훤출하게 바로 거실(居室) 앞에 서있는가 하면 상록수인 잣나무 전나무가 적당한 곳에 검푸른 잎을 자랑하면서 꿋꿋이 서있다. 화초는 분재(盆栽)로 많았다. 현주는 이오 · 륙세밖에 위가 아닌 이모의 집을 찾을때마다 아지못할 열듬감(劣等感)을 느끼고 있었다. 이모는 현주와는 달리 학창시절에도 화려한 것을 좋아했고 그런탓일까 남성과의 교제도 많았다.
원체 남성이 좋아할 수 있는 미모의 소유자이기도 했으나 결코 현주처럼 내향(內向)적이 아니고 적극성이 있어 그 대학의 여왕으로 뽑히는데도 고스란히 앉아 그런 영광이 오는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서글서글한 성격은 학교에서도 많은 친구를 따르게 할 수 있었고 후배가 그 주변에 모여들게 했다. 교수들의 믿음도 차지할 수 있었고….
그런 여자이고 보니 지금의 이모부는 아마 승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경쟁자중에서 이모이 눈에 들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모부는 이모에 대해선 처음부터 공처가(恐妻家)랄 수 있었다.
이번에 외국에 나가게 되었다면, 그래서 현주를 이모가 데리고 가겠다고 제의했다면 그리고 그럴 계제가 가능하다면 이모부는 별말없이 승락할 것이다. 현주는 그 가능성을 생각했으나 그러면서도 이모의 은혜로 양행을 한다는 사실이 어쩐지 늘 은근스럽게 갖고 있는 열등감을 쑤셔놓은듯 했다.
이모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널 만나려고 어저께 늦도록 너네집에 가있었는데….』
『미안해요.』
『어서 들어 오너라.』
응접실은 혜경이네 집과 우열(優劣)을 다툴만큼 화려한 것이었다.
『앉아요.』
여느때 같으면 그렇지 않을텐데 오늘은 공연히 서먹서먹해지는 현주였다.
『차 가져와요.』
이모는 더 예뻐진 얼굴로 웃으면서 현주를 응접 소파에 앉혀놓은뒤에 주방쪽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현주야. 너 정말 유럽 가구싶지?』
억실억실한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현주는 대답이 없다.
『갈 수 있게 됐어…』
『어떻게요?』
이모는 원체 수다스럽다고는 할 수 없으나 할말은 유감없이 하는 성미요 언변(言辯)이다. 남편이 해외 공관의 무관(武官)으로 가게됐다는 사실부터 조리정연하게 이야기해 내려간다.
현주는 그럴것이라고 수긍했다.
『그래서, 말이야…』
이모는 가족까지 동행하게 됐다는 대목까지 이야기하고 나서
『동거인으로 한사람 더 갈 수 있다는 거야…』
이렇게 말했다.
『동거인?』
『그래 동거인이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거야 무슨 명복이든 관계할 거 뭐있어… 가기만 하면 되는거 아니야…』
『명목이 무어라니요?』
현주는 이상한 생각이 갑자기 치밀면서 되물었다.
『까놓구 얘기한다. 명목으로는 가정부(家政婦)라는 거지마는…』
『가정부요?』
현주는
『그럼 식모가 아니얘요?』
저도 모르게 정신이 차려지면서 또 되물었다.
『하아, 명목이 무슨 상관있어. 그런 명목 아니면 여권이 안된다니까 그래…』
의아해하는 현주가 도리어 이상하다는듯 못마땅하다는듯 이모는 말했다.
(가정부 식모…)
현주는 입을 꼭다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