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는 1932년 6월 27일에 전교와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평양에서 창립된 최초의 방인 수도회입니다. 벌써 40년이 되어 오지만 그새 격은 파란은 민족의 수난사와 함께 십자가의 길이었읍니다.
일제시대의 탄압,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로 창설자이신 아녜따 원장님의 납치, 수녀원 해산, 국군의 평양입성 후 맨손으로 부산까지 피난하고… 어찌다 말할 수 있겠읍니까?
오늘 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이북에 남아있는 신자들과 미신자들을 회상하며 천주께 부탁드립니다. 6·25이후의 전교활동에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다른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사제들을 도와 일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도시에서의 전교는 대개다 알고 있기에 생략하고 본회 수녀들이 특별히 많이 일하고 있는 강원도 지역의 전교실황에 대해 몇자 적을까 합니다.
「강원도」라면 누구나 먼저 감자바위 산골, 길이 나쁘고 교통이 불편한곳 빈민이 많은 곳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성 바오로께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앙화라』(꼬린·전·9·16)고 했듯이 어렵다고 전교를 안할 수는 없읍니다. 그런데 강원도의 부유층은 대개가 불교신자라 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대개 우리 신자들입니다.
구제물자가 흔히 배급되던 때는 전교가 잘됐으나 인제 구제품이 없어지자 교회를 멀리하게 됐읍니다. 미신자나 가난한 냉담자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면 교회에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님은 당신의 차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은 뻐스를 타고 다니지만 이는 일시적인 도움 외엔 아무것도 아니었읍니다.
예비자를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도시와는 다릅니다. 도시에서는 시간과 장소에 맞춰 모이게 하지만 강원도에서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예비자가 시간이 있을 때 수녀들이 찾아나가야 됩니다. 산골길을 30여리 헤매고 돌아오면 피곤이 앞섭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서 10·15)하는 말씀도 있지만 이 『아름다운 발』도 피곤에 녹초가 되는 데는 예외가 없읍니다. 그러기에 아름답긴 하겠지만…
어떤 때는 예비자가 버섯따러 나가서 집에 없어 빈집을 지키다 돌아오는 수도 있고 예비자가 일보려고 본당근처에 왔다가 불시에 찾아와 교리강의를 청하는 때도 있읍니다.
미신자나 예비자를 찾아가 타작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해주며 김을 매주고, 월동 준비로 이불을 꿰매 주면서 대화의 길을 만들어야 했읍니다.
『몇 사람이라도 구하기 위하여는 나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나니 나 이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하여 하노라』(꼬린·전, 9·22)하신 사도 성바오로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냉담자를 방문하면(물론 신앙마저 식은 것은 아님) 그들은 서먹해 하거나 방문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 그들의 자녀와 재미있게 얘기하고 놀아주면 그들은 많이 부드러워 지며 대화의 길이 틔여 산 신앙을 갖게 할 수가 있었읍니다.
38선 근방의 촌락을 방문할 때는 무서운 생각이 많이 나며 쓸쓸한 이 지역엔 웃음을 잃은 사람도 있읍니다. 가족이 갈려서 서로 생사를 모르는데다가 그것이 가난의 원인일 때는 그 비참이 더 뼈저린 것 같습니다.
이런 곳에서 전교하는데 보람과 기쁨이 있다면 문맹자들이 순수하게 신앙을 받아들일 때이고 공소에서 수녀의 방문날을 큰 명절처럼 여기며 반가이 맞아 줄때 일 것입니다.
포교 주일을 맞이하여 애로사항을 말씀드리면 ①시계가 없어서 시간개념이 없고(낮과 밤만이 시간의 기준이다) ②문맹 ③경제문제와 의료시설의 빈약.
교회에 바라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면 ①문맹인에게 너그럽기를 바랍니다. 영세찰고 할 때 발음이나 받침 틀린 것까지 불합격의 원인으로 삼을 때는 공든 탑이 무너지는 감을 느낍니다. ②사제들의 부드러운 충고나 가르침이 있기를 바랍니다. 문맹자가 미사나 고해 때 규칙을 모른다고 소리 지르며 야단치시면 새로 영세한 이들에게 실망을 주게 됩니다. ③교리서적이 너무 빈약하며 그나마도 공의회 이후 너무 여러 가지 다른 것이 나와서 복잡합니다. ④도시 신자들이 농어촌의 신자들에게 관심이나 도움의 손길을 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누구나 다 제 나름대로 신앙을 전파할 의무가 있다』(현장 17)고 했듯이 신자는 모두 선교의 의무가 있읍니다.
『듣지 않으면 어떻게 믿으며 설교하는 이 없으면 어떻게 듣겠는가』(로마 10·14)(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