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숲 기슭의 수도원 뒷뜰입니다. 음력 구월구일-제비들이 강남으로 간다고 인사하러 왔읍니다.
과꽃과 사르비아와 다리아 등은 우리도 갈테니 같이 가자고 말하면서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하양, 보라, 노랑 등의 국화꽃은 과꽃 등을 향해 『오늘 밤에 내리는 서리에 국화주를 담아줄테니 하루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또 과꽃과 사르비아와 다리아는 그들끼리 앞둔 이별을 나누기에 정신이 없읍니다.
『사르비아야, 내가 그동안 네게 잘못한게 있으면 모두 용서해 줘! 응!? 혹시 지나가는 잠자리를 내가 가로채어 이야기한 실례같은게 있으면 모두 잊어 줘! 그리고 또…』
『아니 과꽃아, 왜 그런 말을 하지? 나야말로 성미가 급해서 네게 잘못한게 많을 거야, 모두 용서해 주어! 그리고 달밤에 여치 할아버지에게 배운 시를 같이 읊던 그런 것만을 생각하자구나.
그렇지, 모든 아름다운 것만을… 그동안 네가 내게 잘해 주었던 그 모든 것에 감사한다.』
또 채소밭에서는 그들대로의 얘기가 있었읍니다.
『배추야, 무야, 잘있어. 먼저 간다. 고추야, 너는 좀 더 있다가 오겠니?』
『그래 그래 토마토야, 잘 가거라!
지난 여름동안 너의 빨간 두 뺨은 우리들의 큰 기쁨이었다. 네가 가면 우린 쓸쓸하겠지만 내년 여름을 기다리며 너의 안녕을 빌겠다.』
『안녕! 안녕!』
또 숲에서는 소나무가 『도토리나무야, 단풍나무야, 너희들은 기어히 떠나가야 하는 구나, 자, 이 들국화의 꽃다발을 가지고 가렴! 너희들의 옷 빛깔이 참 곱구나』
그 속을 예순을 훨씬 넘은 할아버지 신부님 한분이 기도책을 펴들고 왔다 갔다하고 있었읍니다.
오늘은 일요일-먼 산엘 간다고 수도원 식구들은 모두가 집을 비우고 할아버지 신부님 한분만이 다리가 아파 못가셨으므로 집지기가 되신채 이들을 서성이고 있읍니다.
그래 기도를 다 마치고는 빨갛게 또는 노랑게 단풍이든 뒷 숲의 나무잎들을 바라보셨읍니다. 보다 젊은 시절에 가보셨던 깊은 산의 그것만은 못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아름다웠읍니다.
『음, 울긋불긋 고운 옷을 입었구나. 너희들이 떠나갈 이제…』
말씀을 마치기도 전에 신부님은 자기의 깜정 수도복을 내려다보았읍니다. 거기에 노랗고 빨간 빛이 있을리없었읍니다.
『그렇다. 내 빛은 내가 걸어온 그 길에 있다. 하느님, 당신의 눈에 보이는 나의 빛은 어떠한지요?』
그러고는 문득 하느님의 대답을 들을 듯 수도원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 인쇄소를 보았읍니다.
주일이므로 인쇄소의 문은 닫힌채 묵묵했으나 거기에서 많고 많은 책들이 무더기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읍니다.
그 책들이, 그 책을 만드느라 기울인 노력들이 하느님의 눈에 어떤 빛으로 보였을지 알 수가 없읍니다. 빨간 것이 되었는지 노란 것이 되었는지 거무튀튀한 것이 되었는지? <좀 더 잘해 볼 걸> 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이미 시간은 훌훌히 지나가 버렸읍니다. 수도원장직과 함께 그 숱한 모든 일들은 젊은 새 원장님에게 넘어 간지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 새 원장님을 위해 기도나 바쳐드리자. 그것으로 내 옷 빛깔을 곱게 물들이자>
그때 였읍니다.
『뚜우 뚜우 뚜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읍니다. 모두들이 돌아왔나 봅니다.
신부님은 부리나케 뛰어나가 문을 열었읍니다.
그중에도 잽싼 어린이 수사 한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산에서 끊어온 새빨간 단풍잎 가지를 신부님의 가슴팎에 덥석 안겨주었읍니다.
마치 <신부님 당신의 옷 빛이에요>라고 말하듯…
그날 밤 달은 밝았읍니다. 쥐죽은 듯 수도원의 넓은 뜰은 고요히 묻히고… 아니 귀뚜라미의 노래 소리만이 슬픈 듯 안 그런 듯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별을 앞둔 모든 이들의 귀에는 그 노래 소리가 다음처럼 들려왔읍니다.
울지 말아요.
울지 않겠어.
너는 가지만
헤어지지 않는 것
너에의 기억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웃어 주리.
황정윤(兒童文學家)·그림 김영화